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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8 12:12
제목 [문화일보] 6세때 즉석詩 짓던 神童… 각별했던 인종 죽자 벼슬도 거부
<지식카페>
6세때 즉석詩 짓던 神童… 각별했던 인종 죽자 벼슬도 거부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⑮ 문묘에 종사된 시인 김인후

형체는 둥글며 지극히 크고 한없이 가물한데 - 형원지대우궁현(形圓至大又窮玄)

넓디넓고 텅텅 비어 땅 가를 에둘렀네. - 호호공공요지변(浩浩空空繞地邊)

덮어 가린 그 가운데에 만물을 용납하니 - 부도중간용만물(覆 中間容萬物)

기나라 사람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나. - 기인하위공퇴련(杞人何爲恐頹連)

이 시는 김인후(金麟厚·1510∼1560)가 6세 때 지은 것이다. 어떤 손님이 하늘 천(天)자로 내준 글제에 운(韻)을 청해 즉석에서 지은 시다. 5세 때부터 아버지에게서 ‘천자문(千字文)’을 익힌 솜씨다. 하늘에 대한 묘사도 그럴듯하지만, 그것을 하늘이 무너질까 걱정했다는 기(杞)나라 사람 이야기에 빗댄 것은 더욱 절묘하다. 

하지만 김인후가 처음 천자문을 배울 때는 글을 보기만 하고 묻는 말엔 전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이가 말을 못해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손에 침을 묻혀 창과 벽에 쓰는 것들이 모두 천자문의 글귀들이었다. 또 하루는 아이가 생파를 들고 겉껍질부터 차례대로 속심까지 벗겨내고 있었다. 그것을 본 아버지는 아이가 장난을 치는 줄 알고 나무라자 아이는 파가 자라는 이치를 알고자 그랬다고 답했다. 기발한 아이였다.

8세 때는 전라도 관찰사로 부임했던 조원기(趙元紀)와 함께 시구(詩句)를 한 구절씩 주고받으며 연시(聯詩)를 완성했다. 조원기는 어린 김인후가 하도 기특해 기량을 시험하려고 관기를 시켜 아이를 안고 교방으로 데려가게 했다. 풍악이 시끄럽게 울리고 옷차림이 휘황찬란한 광경에도 어린 김인후는 태연히 보기만 할 뿐 낯빛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 기준(奇遵)은 아홉 살 난 김인후를 가리켜 세자의 훌륭한 신하가 될 자질이 있다고 칭찬했다. 기준이 말한 세자는 훗날 인종이다. 김안국(金安國)은 열 살 난 김인후를 자신의 어린 친구(小友)라며 하은주(夏殷周) 삼대(三代)를 이끈 인물들에 버금갈 재목이라고 극찬했다. 조원기는 조광조(趙光祖)의 삼촌이고, 기준과 김안국은 모두 중종 때 조광조와 뜻을 같이했던 사림파의 주역들이다. 어릴 적부터 글재주로 이름을 날린 이 천재 소년은 일찌감치 사림파를 이끌 재목으로 지목되고 있었다.

시를 잘 짓던 소년답게 13세 때 김인후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 없다(不學詩 無以立)’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고 ‘시경’을 탐독했다. 이 말은 원래 공자가 아들 백어(伯魚)에게 시와 예를 배우라며 했던 말을 변형한 것이다. ‘논어’의 원문은 ‘시를 배우지 않으면 사람들과 대화할 수 없고, 예를 배우지 않으면 남 앞에 설 수 없다(不學詩 無以言 不學禮 無以立)’이다. 남 앞에 선다는 것은 자신의 개성과 인격을 드러내는 것인데, 어려서부터 김인후는 선비의 개성과 인격이 예보다는 시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김인후는 19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22세 때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그 후 그는 여러 관직을 거쳐 34세 때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에 임명됐다. 세자 교육을 책임지라는 중종의 명에 따른 것이지만, 오래전 기준의 예언이 적중했다. 당시 김인후는 세자의 자질이 뛰어나 태평성대를 이끌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해 성심껏 가르쳤다. 세자도 몸소 그린 묵죽도(墨竹圖)를 하사할 정도로 김인후를 각별히 대우했다. 그때가 중종 38년(1543) 4월이었고, 세자는 그 후 대략 1 년 반 뒤인 중종 39년 11월에 즉위했다.

그런데 그해 1월에 동궁(東宮)에 화재가 발생해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당시 궁중에서는 윤원로(尹元老)의 소행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소윤(小尹)의 영수였던 윤원로는 문정왕후가 낳은 왕자 환(명종)의 외숙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살해할 동기도 충분했다. 그러나 범인은 색출하지 못했고, 대윤과 소윤의 각축 속에 세자의 앞날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웠다. 

그러자 이해 6월에 홍문관 부수찬으로 자리를 옮긴 김인후가 상소를 올렸다. 유학 전통의 재이론(災異論)을 동원한 상소의 논리는 이랬다. 첫째, 기묘사화 때 희생된 자들에 대한 신원(伸寃)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둘째, 바른 선비들을 소학(小學)의 무리라고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다. 셋째, 그래서 하늘이 정치를 쇄신하라고 재앙을 내려 경고한 것이다. 요컨대 김인후는 사림 세력의 복권과 결집을 통해 세자를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 김인후는 외척들이 주도하는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 그래서 그해 8월에 부모 봉양을 이유로 휴가를 청해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12월에 옥과(玉果·지금의 곡성) 현감으로 부임했다. 다음 해(1544) 11월에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자 그를 조정으로 불러 제술관(製述官)을 맡겼다. 그런데 이때 인종에게 병환이 생겨 김인후가 약 처방을 논의하는 자리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내의원에서 그를 배척하는 일이 발생했다. 어려서부터 인종의 신하가 될 재목이라는 찬사를 받던 그였지만, 정작 그럴 기회가 오자 곁에서 모실 기회를 박탈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김인후는 곧바로 부모의 병환을 이유로 임지였던 옥과로 돌아갔다.

이후 김인후는 인종을 곁에서 모실 기회를 다시 갖지 못했다. 1545년 7월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았기 때문이다. 김인후는 인종의 승하 소식을 듣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병을 이유로 사직했다. 그 후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이해 8월에 을사사화까지 연이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종을 모신 기간이 길진 않았지만, 그는 인종이 승하한 7월 1일이면 집 남쪽 난산(卵山)에 들어가 술을 마시며 밤새워 곡하기를 해마다 거르지 않았다.

김인후가 인종의 죽음을 애도한 글로는 ‘조신생사(弔申生辭)’와 ‘유소사(有所思)’가 있다. ‘조신생사’는 신생(申生)을 조문하는 글이라는 뜻이다. 신생은 진(晉)나라 헌공(獻公)의 태자였는데, 자신의 아들 해제(奚齊)를 임금으로 세우려는 여희(驪姬)의 모함을 받아 죽었다. 김인후는 모함을 받은 신생의 죽음과 갑작스러운 인종의 죽음을 연결시키려는 의도에서 조사(弔辭)를 지은 것이다. ‘유소사’는 서른 살 인종과 서른다섯 살 김인후가 서로 만난 기쁨도 다 누리지 못했는데 갑작스럽게 이별하게 된 안타까운 심정을 노래한 시다.

김인후는 낙향 후 교육에 매진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먼저 ‘소학’을 읽힌 다음 ‘대학’을 권했는데, 자신의 아들들에게도 10년 동안 ‘소학’ 외에는 다른 책을 주지 않았다. 기묘 사림의 학풍을 계승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김인후의 학문은 40대 후반부터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그는 48세 때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지었고, 49세 때는 기대승(奇大升)과 ‘태극도설(太極圖說)’을 토론한 결과 기대승이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김인후는 교육과 학문을 병행하는 틈틈이 술을 즐겼고 시도 지었다. 사람들이 보낸 술은 맛이 좋고 나쁘고를 가리지 않고 취하도록 마셨다.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찾아와 시를 청하면 병중이나 재계(齋戒)할 때를 빼고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와 함께 술과 시를 즐겼던 제자 중에는 그의 사위 양자징(梁子徵)도 있었다. 

양자징은 담양에 소쇄원(瀟灑園)을 지은 양산보(梁山甫·1503∼1557)의 아들이다. 양산보는 15세 때 상경해 조광조의 문하에서 공부했고, 17세 때 현량과에 합격했지만 선발 인원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탈락했다. 그리고 그해(1519) 겨울에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곧바로 낙향해 별서정원(別墅庭園) 소쇄원을 조성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조광조의 이상을 토론할 이름 그대로 ‘맑고 깨끗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도량(道場)’을 만들려는 것이었다. 최산두(崔山斗)에게 글을 배우러 다니던 김인후도 18세 때부터 오가는 길에 이곳을 들르곤 했다. 이곳에서 김인후와 양산보는 술잔을 기울이며 시를 주고받고 자식들의 혼인도 약속했다. 이 무렵 김인후가 지은 시가 ‘소쇄정즉사(瀟灑亭卽事)’다. 소쇄원이 거대한 원림(園林)으로 조성되기 전 ‘소쇄정’이라는 작은 정자만 있을 때의 시다. 그 후 김인후는 소쇄원을 드나들며 수많은 시를 지었다. 그중 백미는 소쇄원의 48가지 풍광을 읊은 ‘소쇄원48영(詠)’이다.

술과 시를 즐겼고 만년에는 학문에 대한 조예도 깊어 갔던 김인후는 51세에 홀연히 세상을 떴다. 그는 문하에 걸출한 제자를 배출하지 못했고, 그 자신도 탁월한 학문적인 업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그를 위한 문묘 종사 논의도 정조 20년(1796)에야 본격적으로 진행됐지만, 당시 노론 세력이 성사시키고자 했던 문묘 종사 대상자는 조헌(趙憲)과 김집(金集)이었다. 반면에 노론에 정국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정조는 김인후가 문묘 종사 대상자에서 빠진 것을 문제 삼았다. 정조는 5현(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뒤에 문묘에 종사된 인물들이 살아있다면 김인후에게 문묘 종사를 양보했을 것이라며 김인후의 문묘 종사를 고집했다. 정조가 말한 5현 뒤에 문묘에 종사된 인물들이란 이이, 성혼, 김장생,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등이었다. 결국 정조는 노론의 주장을 물리치고 김인후의 문묘 종사만을 허용했다. 그리고 김인후의 위패를 이이의 위패 앞에 배치하도록 결정했다. 김인후의 문묘 종사 성사는 정국의 주도권을 두고 노론 지식권력과 벌인 경쟁에서 왕권이 승리한 결과였다. 연세대 교수

(문화일보 2016년 6월 15일자 24면 14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