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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8 12:11
제목 [문화일보] ‘유배’ 아버지 지극 수발… 家學이어 ‘문묘’에 모시다
<지식카페>
‘유배’ 아버지 지극 수발… 家學이어 ‘문묘’에 모시다

 일러스트=전승훈 기자 jeon@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⑭ 父 이언적의 학문 알린 庶子 이전인

‘이언적은 다만 충효한 사람으로 옛 서적을 많이 읽고 저술을 잘했을 뿐이다. 집안에 있을 때 행실을 보면 부정한 여색을 멀리하지 못했고, 조정에 나가서는 도를 실천할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을사사화 땐 직언으로 항거하지 못하고 여러 차례 추관(推官)을 맡아 잘못된 공신록에 이름을 올렸다. 결국 죄를 얻었지만, 역시 이마에 땀이 흥건할 일이다. 어찌 도학자로 추존할 수 있겠는가.’(석담일기).



‘과거 이이가 이언적을 평할 때 불만스러운 의사를 표시했는데 아무 일 없을 때 앉아서 옛사람의 잘잘못을 따지기는 쉽지만, 자기 앞에 일을 당하면 어찌 옛사람의 뒤를 한두 발자국이라도 따라갈 수 있으랴.’(서애집).

위의 두 글은 이언적(李彦迪·1491∼1553)에 대한 엇갈린 평가의 극단적 예다. 앞의 것은 이이의 평가고, 뒤의 것은 류성룡의 평가다. 물론 이언적 자신과는 무관하지만, 두 평가에는 당색의 차이도 반영되어 있다. 이이의 평가 중엔 “이마에 땀이 흥건하다”는 표현이 특히 혹독하다. ‘맹자’에 어떤 이가 돌아가신 부모를 구렁에 버렸는데 나중에 훼손된 시신을 보고 이마에 땀을 흥건히 흘리며 차마 똑바로 보지 못했다(其상有자예而不視)는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을사사화 때 이언적의 행동이 그 정도로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류성룡은 이언적이 그렇게 행동할 만한 이유가 있었고, 후배가 감히 탁상공론으로 잘잘못을 따질 일이 아니라고 두둔했다.

논란의 배경이 되었던 을사사화는 인종과 명종의 왕위계승을 둘러싼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권력 투쟁에서 시작되었다. 같은 파평 윤씨 가문에 속했지만, 윤임(1487∼1545)이 이끄는 대윤은 인종을 지지하는 세력이었고, 윤원로(?∼1547)·윤원형(?∼1565) 형제가 이끄는 소윤은 명종을 지지하는 세력이었다. 윤임은 중종의 제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낳은 왕자 호(·인종)의 외숙이었고, 윤원형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낳은 왕자 환(·명종)의 외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집안은 왕위계승자 선정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에서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선제공격을 시도한 쪽은 대윤이었다. 윤임이 김안로(1481∼1537)와 결탁해 윤원로·윤원형 형제를 축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들이 공동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김안로의 아들 김희가 동궁(인종)의 누이(효혜공주)와 결혼했기 때문이다. 김안로도 윤임과 마찬가지로 동궁을 보호해야 하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권력 투쟁은 뜻밖의 결과를 낳았다. 중종 32년(1537)에 김안로는 윤원로 형제를 유배 보내는 데 성공했지만, 김안로 자신도 문정왕후를 몰아내려다 사사되고 말았다. 양측 모두 피해를 입었지만, 치명상을 입은 쪽은 오히려 대윤이었다.

김안로가 사사된 후 조정에 복귀한 윤원로 형제는 동궁에게 아들이 없어 세자를 교체해야 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권력 장악을 위해 여론을 조성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국은 소윤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중종이 재위 39년(1544) 만에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준 다음 날 사망했고, 닷새 뒤에 인종이 창경궁에서 즉위했다. 대윤의 세상이 왔고 명분상의 이유로 인종의 즉위를 지지했던 사림의 정치적 지위도 강화되었다. 사림의 지지를 받던 이언적도 인종이 즉위하던 해 우찬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대윤의 시대는 오래가지 않았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문정왕후의 아들인 경원대군(慶原大君)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유언을 남기고 승하하고 말았다. 그리고 12세의 나이로 즉위한 명종을 대신해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문정왕후는 수렴청정 직후에는 대윤의 건의를 받아들여 윤원로를 해남으로 유배 보냈지만, 한 달 남짓 뒤에는 윤원형을 시켜 대윤 측 인사들인 윤임, 유관, 유인숙의 죄를 다스리라는 밀지(密旨)를 내렸다. 그리고 밀지가 내려진 다음 날 충순당(忠順堂)에서 이들 세 사람의 죄를 결정하는 논의가 시작되었고, 결국 이들에게는 참형이 내려졌다. 을사사화가 시작된 것이다.

당시 좌찬성이었던 이언적은 충순당 회의에 참석해 밀지라는 떳떳지 못한 방식으로 사건을 처리한 점을 문제 삼긴 했지만 결국은 윤임, 유관, 유인숙을 처벌하는 데 동조했다. 소윤이 주도하는 대세에 따른 것이다.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본인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3등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명종 1년(1546) 8월 을사사화의 잔당을 색출해 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기 시작하면서 이언적도 밀지의 부당성을 지적했다는 이유로 훈적과 관작을 삭탈 당했다.

이언적은 명종 2년(1547)에 발생한 양재역 벽서 사건도 비껴가지 못했다. 양재역 벽서 사건은 부제학 정언각이 양재역 벽에서 다음과 같은 익명의 붉은 글씨를 발견해 보고하면서 시작되었다. “여주(女主)가 위에서 정권을 잡고 간신 이기(李) 등이 아래에서 권세를 농간하고 있으니,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서서 기다리게 되었다.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벽서에 언급된 여주란 문정왕후를 지목한 것이다. 사건이 발생하자 이기 등은 이를 을사사화의 잔당이 남은 증거로 간주했고, 이언적도 극변안치(極邊安置)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이언적은 유배지였던 평안도 강계에서 필생의 학문적 업적을 쌓았다. 그는 59세 되던 해인 명종 4년(1549)에는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을 집필했다. 또 60세 되던 해 8월에는 조선 예학(禮學)의 선구가 된 ‘봉선잡의(奉先雜儀)’를 완성했고, 10월에는 ‘구인록(求仁錄)’을 집필했다. 그 해에 임금에게 올릴 생각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요점을 정리해 ‘진수팔규(進修八規)’를 지었지만, 결국 임금에게 올리지는 못했다. 63세 되던 해인 명종 8년(1553)에는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를 집필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별세했다.

유배지에서 이룩한 이언적의 학문적 업적이 세상에 알려지고 평가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의 아들 이전인(李全仁·1516∼1568)의 공이었다. 이전인은 이언적이 경주 주학(州學) 교관이던 25세 때 석비(石非)를 통해 얻은 아들이었다. 원래 석비는 감포 만호 석귀동과 경주 관비 족비(足非) 사이에 태어난 딸이었는데, 석귀동에 의해 속신(贖身)되어 이언적을 만났을 때는 이미 관비 신분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런데 석비는 이언적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에서 경상도 수사(水使) 조윤손의 첩이 되었다. 결국 이전인은 조씨 가문에서 태어나 성장하게 되었고, 조윤손은 이전인이 이언적의 아들인 것을 알았지만 자신이 살아 있을 때는 그 사실을 아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인도 오랫동안 조씨 행세를 하고 살았다.

이전인이 자신의 친부가 이언적인 것을 알게 된 것은 조윤손이 죽은 뒤 어머니 석비를 통해서였다. 출생의 내력을 전해 듣고 곧바로 그가 찾아간 곳은 물론 아버지의 유배지 강계였다. 서른두 살의 나이에 조윤손으로부터 물려받은 전 재산을 버리고 친부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 후 그는 아버지가 유배 생활을 하는 7년 내내 곁을 떠나지 않고 정성껏 모시며 학문도 익혔다. 그동안 그는 유배지에서 정리된 아버지의 학문적 성과를 직접 보고 배울 수 있었다. 이때 그가 부자간의 문답을 기록한 책이 ‘관서문답록(關西問答錄)’이다.

그런데 이언적은 정부인 박 씨로부터 아들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유배지에서 사촌 아우의 셋째 아들 이응인을 양자로 받아들여 가문을 잇게 했다. 가문의 품격을 유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언적은 유배지에서 재산도 정리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경주 양좌동의 재산은 이응인에게 주었고, 별도로 일으킨 옥산동의 재산은 이전인의 몫이 되었다.

이언적이 이전인에게 재산을 물려준 것은 그가 그만큼 아버지를 착실히 모셨기 때문이다. 유배지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운구한 것도 이전인의 몫이었다. 탈상 뒤에는 강계에 남겨진 아버지의 유고와 손때 묻은 책들을 수습해 아들 이준과 함께 정리했다. 명종 16년(1561)부터는 아들과 함께 이황을 찾아가 유고 교정과 행장 집필을 부탁했다. 이황은 행장 말미에 이전인 부자가 이언적의 저술들을 보여준 덕에 이언적의 깊은 학문 세계를 깨닫게 되었다고 적었다. 이들은 이황에게 신도비명(神道碑銘)도 부탁했는데, 비명은 이황의 알선으로 기대승이 작성했다. 명종 21년(1566)에는 이언적이 올리지 못한 ‘진수팔규’를 임금에게 바치고 성의가 가상하다는 비답을 받았다. 결국 이황은 선조 즉위년(1567)에 이언적의 복권을 주장하며 그의 학문의 깊이를 거론했다. 이전인 부자로부터 이언적의 저술들을 구해 읽었기 때문이다. 이언적의 문묘 종사 성사는 이황의 평가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적서 차별의 족쇄를 차고서도 가학(家學)만은 잇겠다는 치열한 의지와 노력의 성과이기도 했다.



덧붙임 : 이황과 갈등을 빚었던 조식은 ‘해관서문답(解關西問答)’이란 글에서 이전인을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조식에 따르면, 이전인이 조윤손에게 받은 이름은 옥강이었다. 옥강은 양부 조윤손이 죽었을 때 그가 남긴 재산이 탐나 생부를 찾지 않았다. 그래서 조식이 옥강에게 생부를 찾아가라고 꾸짖은 일이 있었다. 결국 옥강은 조씨 가문에서 내쳐진 뒤에야 경주로 갔는데, 그때도 조윤손의 상복을 입은 채였다. 조식은 그런 옥강을 아비도 몰라보는 간사한 인간이라고 나무랐는데, 그 때문에 옥강이 원한을 품고 ‘관서문답록’에서 자신에 대해 잘못된 기록을 남겼다고 해명했다. 조식은 조윤손과는 집안끼리 연이 닿는 사이이기 때문에 이전인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훤히 알고 있다고 했다. 조식의 주장이 맞는다면, 이전인은 생부를 만나고서 개과천선한 셈이다. 

연세대 교수 (문화일보 2016년 5월 18일자 24면 13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