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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8 12:10
제목 [문화일보] 3년 시묘동안 아내 얼굴도 안봐… 진정한 효행의 師表
<지식카페>
3년 시묘동안 아내 얼굴도 안봐… 진정한 효행의 師表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⑬ 효행으로 문묘에 종사된 정여창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부혜생아(父兮生我)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모혜국아(母兮鞠我)

나를 어루만지고 나를 길러 주시며

무아휵아(부我畜我) 

나를 자라게 하고 나를 키워주시며 

장아육아(長我育我)

나를 돌아보고 다시 나를 돌아보시며

고아부아(顧我復我)

드나들 땐 나를 가슴에 품으시니 

출입복아(出入腹我)

그 은덕 갚고자 할진대

욕보지덕 (欲報之德)

하늘처럼 다함이 없도다

호천망극(昊天罔極)



이 시는 ‘시경(詩經)’ ‘육아(蓼莪)’의 네 번째 장이다. 자식이 부모로부터 받은 은혜가 하늘처럼 커서 갚을 길이 없다는 뜻이다. 정여창은 평소 ‘시경’을 읽다가 이 대목에 이르면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고 한다. 이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정여창은 널리 알려진 효자였다. 그래서 박재형(1838∼1900)은 정여창의 효행을 ‘해동속소학(海東續小學)’에 수록해 초학자들에게 읽혔다. 물론 세상에는 정여창 말고도 효성으로 이름난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효행으로 문묘에 종사 된 사람은 정여창이 유일하다. 선조 37년에 성균관 유생 조명욱 등이 정여창의 문묘 종사를 청원할 때도 그의 학문 외에 집안에서 행실이 돈독했다는 점을 강조했다(선조실록, 37년 3월 19일). 한 마리 좀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에서 ‘일두(一두)’라는 호를 썼던 정여창의 어떤 행실이 그를 조선 지식인의 모범으로 칭송받게 했을까?

정여창은 아버지 정육을과 어머니 최 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여창이란 이름은 정육을이 의주 통판(通判)으로 부임했을 때, 마침 의주에 당도했던 명나라 사신 장녕에게 부탁해 받은 이름이다. 정여창이 8세 때 일이었다. 태어났을 때 지은 이름이 없었을 리 만무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잘 되길 바라는 간절한 염원을 담아 작명을 부탁했다. 정육을의 간곡한 부탁을 받은 장녕은 이름을 지어주며 ‘명설(名說·이름의 뜻을 설명하는 글)’에 “사람이 이름을 귀하게 하는 것이지 이름이 사람을 귀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는 경계의 말도 담았다. ‘네가 집안을 창성시켜라’는 뜻의 여창(汝昌)이란 이름은 이렇게 갖게 되었다.

아들이 귀하게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 정육을은 세조 13년(1467) 5월에 함길도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재직하던 중 이시애의 반란을 토벌하다 전사했다. 당시 18세였던 정여창은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듣고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함양에서 길주로 2000리 길을 나섰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나선 지 한 달 만에 악취가 나는 시체들 속에서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와 고향에서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1년 뒤 조정에서는 국가를 위해 순절한 자의 자식에게 벼슬을 주는 관례에 따라 정여창에게 군직을 내렸다. 그러나 정여창은 부친의 순국을 대가로 자식이 벼슬을 얻을 수 없다며 사양했다.

정육을의 자식 사랑이 각별했던 만큼 아버지를 잃은 정여창의 상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술을 즐겼던 정여창은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어느 날 친구들과 어울려 통음을 하고 들판에 쓰러져 밤을 지새운 적도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혼자 된 내가 믿을 사람은 너뿐이다. 그런데 네가 지금 이 모양이니, 나는 누굴 믿고 의지하겠느냐?”며 아들을 꾸짖었다. 이 뒤로 정여창은 크게 뉘우치며 술은 물론 감주(甘酒)도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뒤로 정여창은 늘 어머니 곁에서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고 기쁘게 해드리는 것으로 일상을 보냈다. 한 번은 정여창이 향회(鄕會)에서 소를 잡아 잔치를 벌였는데, 국법으로 금지한 물품을 썼다고 고발당한 일이 있었다. 이 때문에 어머니의 근심이 크자 정여창은 이후로 다시는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정여창이 서른넷에야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간 것도 “아비 없는 아이가 배우지도 못해서 어찌하겠느냐”는 어머니의 질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균관에 입교한 뒤로는 동료들이 코를 골고 잘 때도 홀로 잠들지 않았다. 이를 본 동료들이 참선을 하느라 자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로 정여창은 학업에 정진했다.

정여창은 3년 만에 고향을 다시 찾았다. 고향에 역병이 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의 안부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마을에는 이미 이웃끼리도 왕래가 없어진 상황이었고, 사람들도 정여창에게 밖에서 문안을 드리라고 권할 정도였다. 그러나 정여창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집안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뵈었다. 과연 어머니는 이질을 앓고 있었다. 정여창은 어머니의 병세를 확인하기 위해 대변을 직접 맛보며 간호했고, 어머니 대신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늘에 호소했다. 그래도 어머니의 병세가 호전되지 않자, “정성이 부족해 신명이 도움을 받지 못했으니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며 머리를 기둥에 부딪쳐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자신을 책망했다. 이를 본 주위 사람들 중에 눈물을 흘리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정여창의 지극 정성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10여 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를 잃은 정여창은 통곡을 하다 피를 토했고, 미음 한 숟갈도 입에 넣지 않아 거의 목숨을 잃을 지경까지 이르렀다. 상례를 치를 때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역질이 돌면 모든 상례 절차를 생략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러나 정여창은 모든 것을 예법에 정해진 절차에 따랐다. 그런 그를 보고 마을 사람들은 그마저 역질에 걸릴까 염려했지만, 그는 다만 심하게 수척해졌을 뿐 무사히 장례를 마쳤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 사이에선 역질도 효자를 해칠 수 없다는 칭송이 자자했다.

정여창은 장례를 마친 뒤에도 정성을 다해 부모를 섬겼다. 그는 시묘살이 3년 동안 한 번도 무덤 곁을 떠나지 않았고, 아내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가산을 챙기지 않는 정여창을 위해 어머니가 별도로 마련해 둔 재산도 모두 상례 비용으로 충당했다. 또 저축이 넉넉했던 어머니가 평소 함양 백성들과 주고받은 빚 문서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어머니가 빚을 주고받을 때 필시 백성들로 원망을 들은 일이 있었을 터였기 때문이다.

정여창의 이런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성종 21년(1490)에 조효동과 윤긍이 상소를 올려 그를 천거했다. 성종은 이들의 상소문을 읽고 “눈물이 흐르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했다”며, 그를 속히 발탁해 국가가 선행을 권장하는 뜻을 널리 알리라고 전교했다. 그리고 조정에선 그에게 소격서 참봉(종9품)을 제수했다. 그러나 정여창은 자신의 행동이 아들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며 사양했다. 정여창의 나이 41세 때의 일이었다.

결국 정여창은 그해 겨울에 문과 별시에 급제해 예문관 검열(정9품)에 임명되었다가 곧바로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 설서(정7품)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정여창이 가르친 세자는 연산군이었다. 정여창은 학문을 즐기지 않던 세자를 바로잡으려고 완곡하게 간언하곤 했는데 세자는 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정여창은 성종 25년(1494)에 외직을 자원해 안음 현감(종6품)이 되어 세자 곁을 떠났다. 그리고 무오사화가 일어난 연산군 4년(1498)까지 현감 직을 충실히 수행했다.

무오사화는 김일손이 김종직의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기록했고, 연산군이 이것을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난한 것으로 해석하며 불거진 사건이다. 정여창이 이 사건에 연루된 것은 세조의 계유정란 때 희생된 전라도 도체찰사(都體察使) 정분의 억울함을 밝힌 전기를 지었기 때문이다. 정여창은 부친과 교분이 있던 승려 탄으로부터 정분이 죽은 내막을 전해 듣고 김일손의 부탁으로 전기를 지었는데, 김일손이 이것을 사초에 기록해 사달이 났던 것이다. 결국 정여창은 김종직의 문도였고 정분의 전기를 지었다는 이유로 곤장 백 대를 맞고 함경도 종성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그는 연산군 10년(1504) 4월 유배지에서 55세를 일기로 별세했고, 그 해 9월에 일어난 갑자사화 때 그 문제가 다시 불거져 부관참시 당했다.

정여창은 지방관인 종6품 현감으로 관직 생활을 마감했다. 그의 저술로 알려진 ‘용학주소(庸學註疏)’, ‘주객문답(主客問答)’, ‘진수잡저(進修雜著)’ 등도 지금은 모두 전해지지 않는다.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두 불태워졌다는 점을 감안 하더라도, 저술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을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선정되어 문묘에 종사 되었다. 그의 문묘 종사를 청원했던 여러 상소들이 공통적으로 밝힌 이유는 김굉필과 정여창이 뜻을 합해 같은 길을 추구한(志同道合) 사이였기 때문에, 김굉필을 종사하면서 정여창을 종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여창이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조명욱이 상소에서 밝힌 바와 같이 그의 효행이 조선 사회의 사표로 삼을 만했기 때문이었다. 조효동이 정여창을 천거할 때 “충신은 반드시 효자 가문에서 찾아야 한다(求忠臣 必於孝子之門)”고 했던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조효동의 말은 후한서(後漢書) ‘위표열전(韋彪列傳)’을 인용한 것이다. 

‘위표열전’에는 조효동이 인용한 말 앞에는 “효로 어버이를 섬기기 때문에 충을 임금에게 옮길 수 있다(事親孝 故忠可移於君)”고 했던 공자의 말이 더 있다(효경, 14장). 공자의 말은 효(孝)를 임금에게 옮기면 곧 충(忠)이 된다는 뜻이다. 깨지기 쉬운 군신 간의 충성 윤리를 절대로 깨지지 않는 부자간의 효 윤리에 비견해 임금에 대한 신하의 절대적 충성을 확보하려는 전략이다. 그 결과 진정한 효자라면 진정한 충신이 될 수 있다는 신화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효자 정여창이 충신의 상징 정몽주의 뒤를 이어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문화일보 2016년 4월 12일자 24면 12회 참조)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