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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7-28 12:09
제목 [문화일보] “실천이 곧 학문”… 斬刑(참형)받을 때도 ‘孝經’지키려 수염 입에 물어
<지식카페>
“실천이 곧 학문”… 斬刑(참형)받을 때도 ‘孝經’지키려 수염 입에 물어
부모에게 물려받은 몸·털·피부 훼손할 수 없다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12) 문묘 종사된 大유학자 - 김굉필

김굉필을 김종직의 문도(門徒)라는 이유로 곤장 80대를 치고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시켰다(연산군 4년 7월 19일). 

평안도에 흉년이 들어 김굉필을 전라도 순천으로 이배했다(연산군 6년 5월 7일). 

김굉필을 철물 저자(鐵物市)에 효수하라고 전교했다(연산군 10년 10월 7일). 김굉필에게 우의정을 증직했다(중종 12년 8월 26일). 

김굉필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종사하기로 결정했다(광해군 2년 9월 4일).

위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김굉필(1454∼1504)의 문집인 ‘경현록’ 연보에서 추린 것이다. 김굉필은 김종직의 제자라는 이유로 연산군 때 자행된 두 번의 사화에 연루돼 유배와 처형을 당했고, 중종 때 정치적으로 복권된 후 광해군 때 문묘에 종사됐다. 도대체 김굉필은 어떤 사람이었기에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돼 극형을 당하고도 스승도 성취하지 못한 문묘 종사가 가능했을까?

김굉필의 아버지 김유는 세조 8년(1462) 무과에 합격한 무인이었다. 김굉필과 함께 태어난 쌍둥이 형제는 어려서 죽은 듯하고, 12명 형제도 모두 장성하지 못했다. 김굉필은 독자로 자랐던 셈이다. 어렸을 때 성격은 매우 거칠었던 모양이다. 예닐곱 살 땐 아무 거리낌 없이 저잣거리를 누비며 무례하고 거만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이 파는 고기나 두부를 채찍으로 마구 갈겨, 사람들은 그를 보면 피해 다니기 일쑤였다. 아버지의 무인 기질을 닮아 호방하기도 했지만, 집안의 귀한 독자였던 탓에 거칠 것 없는 개구쟁이로 자란 것이다.

어린 김굉필의 거친 성품은 예법을 중시하는 엄한 어머니의 가르침 덕에 서서히 바로잡혀 갔다. 어머니는 김굉필에게 새벽마다 마루 아래에서 문안을 시키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엄정한 얼굴빛으로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때마다 김굉필은 감히 물러나지 못하고 공경하고 효도하는 도리를 다해 어머니가 기뻐하는 기색을 보고서야 물러났다. 그 덕에 김굉필은 장성해서 글을 배워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종 11년(1480) 김굉필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김굉필의 학업 성취에 결정적인 자극이 된 것은 21세 때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가 배운 ‘소학’이었다.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소학을 가르치며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광풍제월’이란 비 갠 뒤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이란 뜻이다. 마음이 넓고 쾌활해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이는데, 북송 때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한 데서 유래했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을 지은 성리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이었다. 김종직은 ‘소학’을 초학자들의 입문서로만 간주하지 않고, 성리학 공부의 요체로 판단하고 김굉필에게 권했던 것이다.

김굉필은 성리학 공부의 출발점이 ‘소학’에 있다는 가르침을 받고 평생 실천하며 살았다. 김굉필은 시를 많이 남기지 않았지만, 그중에 ‘소학을 읽음(讀小學)’이란 시가 있다. 아마 ‘소학’을 읽기 시작한 직후에 지었을 것이다.



문장을 업으로 삼고도 천기를 몰랐는데,

業文猶未識天機(업문유미식천기)

‘소학’ 글 속에서 어제의 잘못을 깨달았네.

小學書中悟昨非(소학서중오작비)

이것을 쫓아 정성껏 자식 직분 다하리니,

從此盡心供子職(종차진심공자직)

잗달게 부귀영화 어찌 부러워하랴.

區區何用羨輕肥(구구하용선경비)



김종직은 “이 말은 곧 성인이 되는 근본을 지적한 것이다. 허형 이후에 어찌 그만 한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평했다. 허형은 원나라의 대성리학자였으니, 김종직이 김굉필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다는 뜻이다. 김굉필은 ‘소학’에 입문한 뒤 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나이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다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랏일을 물으면 “소학동자(小學童子)가 어찌 대의(大義)를 알겠느냐”고 대답했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김굉필과 함께 공부했던 남효온(1454∼1492)의 증언이다.

남효온은 김종직과 김굉필 사이에 있었던 또 다른 일화도 전했다. 성종 17년(1486)의 일이다. 당시 김종직은 이조 참판으로 있었지만, 조정에 건의한 일이 없다는 평판을 듣고 있었다. 그러자 김굉필이 이를 풍자한 시를 지어 스승에게 보냈다.



도란 겨울에 갖옷 입고 여름에 얼음 마시는 것,

道在冬구夏飮氷(도재동구하음빙)

날 개면 다니고 장마엔 멈추는 것 어찌 전능하리오.

霽行료止豈全能(제행료지기전능)

난초도 세속을 따르면 마침내 변하고 마니,

蘭如從俗終當變(난여종속종당변)

소는 밭을 갈고 말은 탈 수 있다는 걸 누가 믿으랴.

誰信牛耕馬可乘(수신우경마가승)



묘하게 뒤엉킨 심사가 드러난 시다. 이황도 이 시를 읽고 알기 어려운 곳이 있다고 했다. 이황이 제자 이정에게 보낸 편지에서 해석한 것을 풀면 다음과 같다. 겨울엔 갖옷 입고 여름엔 얼음물 마시듯이, 도(道)의 실천은 때와 장소에 맞아야 한다. 정치도 그렇다. 날이 개면 길을 나서고 비가 오면 들어앉듯이, 치세엔 나가고 난세엔 물러나기를 알맞게 해야 한다. 물론 그것을 온전히 잘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난초도 잡초 속에 섞이면 향기를 잃듯이, 군자가 세속에 영합할 수는 없다. 군자가 세속에 영합한다면, 소의 본성은 밭을 갈고 말의 본성은 사람을 태우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인들 누가 믿고 따르겠는가. 이런 김굉필의 풍자에 김종직도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했다.



분수 밖의 벼슬 벌빙의 지위에 이르렀건만,

分外官聯到伐氷(분외관연도벌빙)

임금 바루고 세속 구제하는 일 내 어찌 감당하랴.

匡君구俗我何能(광군구속아하능)

후배들의 우졸하단 조롱 가르침으로 받아들이겠건만,

從敎後輩嘲迂拙(종교후배조우졸)

잗달게 권세와 이익엔 편승하지 않으리라.

勢利區區不足乘(세이구구부족승)



벌빙(伐氷)이란 장례나 제례 때 얼음을 쓸 수 있는 경대부(卿大夫) 이상의 높은 벼슬이다. 그러나 김종직은 그 자리에 있으면서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고 세상을 구제할 임무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 때문에 후학들로부터 우졸(迂拙)하다고 조롱받았지만, 구차하게 권세와 이익을 쫓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황은 김굉필의 시에 대해 김종직이 도학에 뜻을 두지 않고 시문에만 열중했던 점을 비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스승과 제자의 분의(分義)가 엄중함에도 사제관계가 계속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남효온이 이 시로 인해 둘 사이가 벌어졌다고 지적했던 것을 염두에 둔 평가였다. 그러나 김굉필은 김종직에게서 배운 소학 정신만은 일생의 지침으로 삼고 살았다. 소학 정신의 핵심은 물 뿌리고 마당 쓸고(灑掃), 응하고 대답하며(應對), 나아가고 물러나는(進退) 세 가지 예절과 어버이를 사랑하고(愛親), 어른을 공경하며(敬長), 스승을 높이고(隆師), 벗을 가까이 하는(親友) 네 가지 방도에 있었다. 김굉필은 소학 정신에 기초한 일상의 예절을 자식들에게 가르쳤고, 소문을 듣고 배우러 온 후학들은 자리가 비좁을 정도로 가득 찼다.

김굉필은 후학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며 ‘한빙(寒氷)’의 교훈을 남겼다. ‘한빙’이란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지만 쪽보다 푸르고 얼음이 물에서 나왔지만 물보다 차다’는 뜻이다. 김굉필은 후학들에게 소학을 가르치며 제자가 스승보다 낫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얇은 얼음 밟듯이 매사에 경계해야 한다는 뜻도 담았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조목 18가지를 ‘한빙계(寒氷戒)’에 담아 제자 되기를 청한 반우형(潘佑亨)에게 전했다.

소학 정신의 실천과 교육에 매진했던 김굉필에게 출사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41세 때인 성종 25년(1494)이었다. 이때 그는 숨은 선비(遺逸)를 천거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경상감사의 추천을 받고 서울 남부의 참봉(종9품)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다음 해 연산군 원년에 전생서 참봉으로 옮겼다. 연산군 2년(1496)에는 군자감 주부(종6품)가 됐고, 곧바로 사헌부 감찰(정6품)로 자리를 옮겼다가 연산군 3년(1497)에 형조 좌랑(정6품)을 맡았다. 그러나 그의 관직 생활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연산군 4년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라는 이유로 유배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참형을 받고 저잣거리에 효수됐다.

김굉필의 마지막 모습은 단아하고 비장했다. 사형 명령이 내려지자 김굉필은 목욕을 하고 관대(冠帶)를 갖춘 후 형장에 나갔다. 그리고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칼날을 받았다. ‘몸과 터럭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할 수 없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損)’는 ‘효경(孝經)’의 가르침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는 당나라 한유의 글을 좋아했고, 특히 ‘장중승전 후서(張中丞傳 後序)’에서 장순(張巡)이 남제운에게 “남아는 죽어도 불의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한 대목을 볼 때마다 세 번 되풀이해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죽음도 불의에 굴하지 않은 의연한 죽음이었다.

김굉필은 평생 호를 갖지 않았다. 처음엔 도롱이 입은 늙은이란 뜻에서 사옹(蓑翁)이란 호를 지었다. 도롱이를 걸쳐 큰비를 만나도 겉은 젖지만 속은 젖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이것마저 금세 던져 버렸다. 이름을 드러내는 것은 의연히 처세하는 도리가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동시대 사람들은 그를 대유(大猷)라고 불렀지만, 그것은 호가 아니라 자(字)였다. 후학들은 그를 한훤당(寒暄堂)이라 불렀지만, 그것도 호가 아니라 원래는 처가 옆에 지은 작은 서재 이름이었다.

김굉필은 평생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고, 그의 정치적 명망도 순교(殉敎)를 부를 만큼 뚜렷하게 드러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이 즉위하자, 폭정의 희생자들을 반정의 상징으로 초혼할 필요가 있었다. 소학 정신으로 무장하고 불의에 타협하려 하지 않았지만 사화를 만나 무고하게 희생된 김굉필은 반정의 상징으로 삼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김굉필은 반정 시대의 주역 조광조에게 유배지에서 소학 정신을 가르쳤던 인연도 있었다. 그래서 조선 최초로 문묘 종사 대상자 선정이 논의되자 김굉필도 정몽주와 함께 거론됐고, 정몽주의 문묘 종사가 확정된 중종 12년(1517)에 우의정으로 추증됐다. 그리고 다시 광해군 2년(1610)에 그는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함께 문묘에 종사됐다. 소학 정신의 실천으로 이황이라는 대유학자와 같은 반열에 오르게 된 것이다. (문화일보 2016년 3월 16일자 24면 11회 참조)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