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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18 18:51
제목 [문화일보]功名보다 人格 완성에 매진한 퇴계, 제왕의 길을 가르치다
<지식카페>
功名보다 人格 완성에 매진한 퇴계, 제왕의 길을 가르치다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⑨ 임금을 가르친 지식인-이황

선조 1년(1568) 8월 열린 경연에서 68세의 원로 학자 이황(1501∼1570)이 즉위한 지 갓 1년을 넘긴 17세의 어린 임금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건괘(乾卦)의 상구(上九·여섯 번째 효)는 지위가 지나치게 높아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귀하지만 지위가 없고, 높지만 백성이 없어, 항룡(亢龍·높은 용)에겐 후회가 있다(亢龍有悔)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임금이 숭고함을 자처해 어진 이를 홀대하고 자신만 성인인 체하거나, 자신만 지혜롭다고 생각하며 세상을 마음대로 주무르려 하고, 아랫사람에게 자신을 낮추려는 의지가 없다면, 재앙을 맞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이것을 아신다면 큰 허물은 없게 될 것입니다.”

‘주역’의 건괘는 용을 상징하고, 건괘를 구성하는 6개의 효(爻)들도 각기 다른 용으로 해석된다. 특히 건괘의 6개 효 중에서는 5번째를 가장 중정(中正)한 자리로 간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5번째 효를 하늘에 있는 비룡(飛龍)이라 부르고, 주위의 대인(大人)으로부터 도움을 받으면 이롭다고 풀이한다. 반면에 중정의 도를 지키지 못하고 지나치게 높아진 6번째 효를 항룡이라 부르고, 항룡에겐 후회가 있다고 풀이한다. 요컨대 이황은 어린 임금에게 자신을 낮추고 지식인들의 지혜를 겸허히 경청할 줄 알아야 항룡의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경계했다.

‘주역’은 유학의 기본 경전이고, 경연은 임금 앞에서 경서(經書)를 강독하던 일상적인 제도였다. 그러니 그 자리에서 임금에게 항룡의 재앙을 경계하는 것은 지극히 상식적인 발언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황이 살았던 시대를 염두에 둔다면, 임금에 대한 직언은 목숨을 건 매우 위험한 도박일 수 있었다.

이황도 목숨을 건 직언 때문에 화를 입은 지식인의 선례를 잘 알고 있었다. 기묘사화 때 희생된 조광조가 대표적인 경우였다.(문화일보 2015년 11월 18일자 24면 7회 참조) 그러나 유교 지식인이라면 모름지기 임금의 잘못도 바로잡을 수 있는 책임감을 가져야 했다. 그것은 유교 정치의 건강성을 담보하는 맹자(孟子) 이래의 오랜 전통이기도 했다. 그래서 이황은 선조 즉위 직후 문묘 종사 논의가 재개되자, 중종에게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조광조를 문묘 종사 대상자의 필두로 지목했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는 항룡유회 운운하며 임금에게 자신을 낮추고 지식인의 지혜를 경청하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이황이 이처럼 임금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경륜이 풍부한 노회한 정치가여서 한비자(韓非子)가 말한 유세(遊說)의 어려움을 잘 터득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평생 학자의 지조를 지키며 살아서 세론(世論)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일까?

이황은 진사 이치(李埴)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지만, 2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했다. 어머니는 홀로 농사와 양잠으로 생계를 꾸려가면서도, 자식들이 과부의 자식 소리를 듣지 않도록 엄하게 가르쳤다. 그 덕에 이황은 6세 때 처음으로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했고, 12세 때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고, 20세 때는 침식을 잊을 정도로 ‘주역’을 탐독했다.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를 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어머니의 뜻에 따라 34세 때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그 후 그는 43세 때 성균관 사성(司成·종3품)에 임명될 때까지 순탄한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는 본래부터 세상의 이끗에 밝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집 담장 안으로 떨어진 밤톨 하나도 가동(家)이 주워 먹을까봐 손수 주워 담 너머로 던졌던 사람이다. 그가 서울에서 세 들어 살던 때 일화다. 세상에서는 그의 이런 성품을 개결(介潔)하다고 평가했다. 개결하다는 말은 성품이 깨끗하고 올곧다는 뜻이다. 그의 성품이 이러하니 공명(功名)을 다투는 관직 생활이 즐거울 리 없었다.

결국 이황은 성균관 사성에 임명된 직후 처음으로 은퇴를 결심했고, 52세 때 성균관 대사성(정3품)에 임명될 때까지 세 차례나 은퇴와 출사(出仕)를 반복했다. 특히 46세 때 결행했던 두 번째 은퇴는 그 전 해 일어났던 을사사화(1545)의 여파와 무관하지 않았다. 당시 이황은 을사사화를 주동했던 이기의 주청으로 관직을 삭탈 당했다가, 평소 이황을 존경했던 이기의 조카 이원록의 도움으로 복직된 일이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그는 학문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고, 고향 시냇가에 양진암(養眞庵)이라는 작은 암자를 지었다. 암자를 지은 시내의 이름은 속명으로 토계(兎溪)였는데, 그는 토(兎) 자를 퇴(退) 자로 고쳐 자신의 호로 삼았다.

물러날 뜻을 연이어 내비쳤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의 부름이 계속되자, 이황은 48세 되던 해에 외직을 자원해 단양 군수와 풍기 군수를 잇달아 지냈다. 그러나 50세 때는 군수직마저 버릴 결심으로 감사에게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하고는 회답도 기다리지 않은 채 책 두어 상자뿐인 단출한 행장을 꾸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그는 임지를 무단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職牒·임명장)을 박탈당했다. 이때 그의 형 이해도 이기가 재상감이 아니라고 논란한 것 때문에 미움을 받아 곤장을 맞고 귀양 가던 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황이 아무런 직책을 맡지 않았던 해는 51세 때뿐이었다. 그가 52세 되던 해에는 조정에서 다시 그를 홍문관 교리(정5품)로 불러들였고, 곧이어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했지만 지병을 이유로 사임했다. 그가 53세 되던 해에도 조정에선 그를 다시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했지만, 칭병하며 사임했고, 조정의 임명과 그의 사임은 그가 70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조정에선 무엇 때문에 그를 한사코 불러들이려 했고, 이황은 무엇을 위해 거듭 사임을 고집했을까? 조정이 이황을 부른 이유는 명종 21년(1566) 이황의 66세 때 일화에서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임금은 “어진 이를 불러도 오지 않음을 탄식한다(招賢不至嘆)”는 글제를 신하들에게 내려 시를 짓게 했고, 화공을 시켜 이황이 은거하던 도산 풍경을 그리게 했다. 그리고 그림 위에 당대의 명필 송인(宋寅)을 시켜 이황의 ‘도산기(陶山記)’와 ‘도산잡영(陶山雜詠)’을 쓰게 한 뒤 병풍을 만들어 처소에 두었다. 위인지학(爲人之學)을 탐내지 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즐기던 그의 학문이 사익만 추구하던 당대 정치의 쇄신에 요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위인지학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공부하는 것이며, 위기지학은 사욕(私慾)이 자라나는 것을 끊임없이 경계하는 공부다. ‘논어’ 헌문(憲問) 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황이 기를 쓰며 은퇴를 고집한 이유도 위기지학을 실천하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56세), ‘논사단칠정서(論四端七情書)’(59∼66세), ‘심경후론(心經後論)’(66세), ‘성학십도(聖學十圖)’(68세) 등 주요 학문적 업적이 그가 관직에서 은퇴한 이후에 완성된 것도 위기지학을 이루려는 그의 열망이 노년에도 식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기대승(奇大升·1527∼1572)과 벌인 8년간의 논쟁을 엮은 ‘논사단칠정서’에는 26세 연하의 젊은 학자에게도 불치하문(不恥下問)했던 그의 학문적 자세와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리고 ‘성학십도’는 17세의 어린 임금에게 제왕의 길을 가르치려는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황에 대한 당시의 평가가 모두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특히 조식의 문인이었던 정인홍은 광해군 3년(1611) 3월에 이른바 ‘회퇴변척소(晦退辨斥疏)’를 올려 회재(晦齋) 이언적과 퇴계 이황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들을 문묘에서 퇴출시키자고 주장했다. 이 상소에서 정인홍은 이황이 조식을 세 가지 점에서 비방한 것을 문제 삼았다. 이황의 조식 비판은, 첫째로 상대방에게 오만하고 세상을 경멸했다는 점, 둘째로 높고 꼿꼿한 선비를 자처해 중도(中道)를 지키지 못했다는 점, 셋째로 노장(老莊)을 숭상했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해 정인홍은 오히려 이황이야말로 과거로 출신한 자로서 완전히 나아가지도 않고 완전히 물러나지도 않은 채 서성댔으면서도 중도를 지켰다고 자처하며 세상을 기롱했다고 비판했다. 동인(東人)이 남인(南人)과 북인(北人)으로 분열되던 당쟁의 와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조식도 이황을 비판했다. 이황이 죽음에 임박해 형의 아들 영(寗)에게 유언을 남기며 예장(禮葬)을 사양하고, 비석 대신 조그만 돌 앞면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새기라고 당부했던 때의 일이다. ‘퇴도만은’이란 도산(陶山)으로 물러난 만년(晩年)의 은사(隱士)라는 뜻이다. 조식이 이 소식을 듣고 “퇴계는 이 칭호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 나 같은 사람도 은사라고 불리기에는 부끄러움이 있다”고 냉소했다.

물론 일생을 처사로 살았던 조식에 비하면, 이황의 삶은 처사로 불리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그 스스로는 물러나기를 원했지만, 조정은 끊임없이 그를 필요로 했고, 그도 때에 따라 그 요구에 부응해 지식인의 책임을 다해야 했다. 그러나 이황은 죽는 순간까지 개결한 성품을 지키려고 애썼다. 그는 숨을 거두기 닷새 전에 남에게 빌린 책들을 돌려보냈고, 나흘 전에는 화려한 장례를 삼가라는 간단한 유언을 남겼다. 그리고 돌아가신 당일에는 화분에 심은 매화에 물을 주게 하고 일어나 앉아서 편안히 운명했다. 만년의 이황이 어린 임금에게 제왕의 길을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이 세속의 공명을 쫓지 않고 인격 완성에 평생을 매진했기 때문이었다. (문화일보 2015년 12월 19일자 24면 8회 참조)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