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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18 18:48
제목 [문화일보]“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록으로 倭와 맞선 ‘붓을 든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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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기록으로 倭와 맞선 ‘붓을 든 영웅’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⑪ 난세에 빛난 리더십 - 유성룡

중종 37년(1542) 유성룡이 외가가 있던 의성(義城)에서 태어났다. 임신 중이던 어머니는 꿈에 하늘에서 내려온 어떤 사람에게서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는 예언을 듣고 아들을 낳았다. 유성룡은 4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6세 때는 ‘대학’을 읽었다. 이 귀한 아들은 여섯 살 때 강물에 빠져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갑자기 큰 물결이 일어 아이를 언덕 위로 안전하게 옮겨주었다. 유달리 총명했던 소년은 21세 때 퇴계 이황을 만나 여러 달 동안 ‘근사록(近思錄)’ 등을 배우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이때 이황은 유성룡을 가리켜 “하늘이 낸 사람이다. 훗날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다”고 평가했다. 퇴계의 문도들에겐 이 평가가 유성룡에게 남인 집단의 영수(領袖) 자격을 부여하는 선언과도 같았다.

그러나 남인의 영수라는 꼬리표 때문에 그는 북인과 서인으로부터 협공을 받기도 했다. 예컨대 북인 집권기에 편찬된 ‘선조실록’의 유성룡 졸기(卒記)에는 그의 인품을 “규모가 좁고 마음이 굳세지 못해 이해가 눈앞에 닥치면 반드시 흔들렸다”고 평가했다. 또 서인 집권기에 편찬된 ‘선조수정실록’의 졸기에도 “국량이 협소하고 지론(持論)이 넓지 못했다”는 평가가 실려 있다. 요점은 지론이 편협했고, 위기 대처 능력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먼저 그의 학문부터 짚어보자. 그는 이황의 문하생이었지만, 성리학(性理學)만 고집하지 않고 양명학(陽明學)에도 관심을 가졌던 통유(通儒)였다. 그는 자신의 문집에 양명학을 처음 접하게 된 계기와 그 후의 오랜 관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 두었다. 

“내가 17세 때 아버지를 따라 의주(義州)에 갔었다. 때마침 사은사(謝恩使) 심통원(沈通源)이 연경(燕京)에서 돌아왔는데, 가져온 짐바리가 너무 많았다. 이 때문에 그는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압록강(鴨綠江)가에 짐바리를 내버리고 갔는데, 짐 보따리 속에 양명(陽明)의 문집이 있었다. 양명의 글이 아직 우리나라에 들어오지 않았던 시절이다. 내가 그것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서 아버님의 허락을 받아 글씨 잘 쓰는 아전을 시켜 베껴 두었다. 그리고 상자에 담아 소중하게 간직한 지 어느덧 35년이 흘렀다.”

실제로 유성룡이 아버지를 따라 의주에 갔던 것은 14세 때였다. 유성룡 연보(年譜)의 기록이다. 그리고 실록에는 그다음 해인 명종 11년(1556)에 심통원이 과도한 짐바리 때문에 대간의 탄핵을 받은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두 기록을 종합해보면 심통원이 버리고 간 짐 보따리 속에서 유성룡이 ‘양명집’을 발견한 것은 15세 때였을 것이다. 그때 발견한 ‘양명집’은 임진왜란의 와중에 유성룡의 옛집과 서적들이 불탔을 때도 온전히 보존되었다. 그래서 그는 35년(실제로는 37년) 전의 기억을 더듬어 갖고 있던 ‘양명집’ 뒤에 소장 내력을 정리해 두었다. 그의 나이 52세 때인 선조 26년(1593) 9월 8일의 기록으로 ‘서애집’에 실려 있다.



물론 유성룡이 양명학을 비판했던 증거도 여럿 있다. 그가 28세 때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으로 발탁돼 연경을 다녀왔는데, 이때 양명학에 기울어져 있는 명나라 태학생들의 학문 태도를 논박했다는 기록도 그중 하나다. 또 29세, 30세 무렵엔 육구연(陸九淵)의 상산학(象山學)에도 관심을 가졌다가, 부친상을 당한 32세 이후엔 주자학에만 매진했다는 자신의 술회도 있다. 그러나 유성룡은 어린 시절 우연히 입수한 ‘양명집’을 평생 소중히 간직했다. 게다가 그는 63세 때도 ‘양명집’을 읽고 독후감과 시 두 수를 남겼다. 물론 내용은 양명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드러낸 것이지만, 그에게 ‘양명집’은 만년까지도 읽고 또 읽을 정도로 중요한 독서 대상이었다.

사실 양명학과 양명학 관련 서적은 적어도 조선에선 금기의 대상이었다. ‘전습록논변(傳習錄論辯)’을 써서 양명학을 비판했던 이황의 영향이 컸다. 이황의 제자였던 유성룡도 양명학을 비판하는 대열에선 예외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양명학을 무조건 배척하지만은 않았다. 이황의 문인 조목(趙穆)이 유성룡에게 양명학에 빠져 있다고 비판하자, 유성룡은 “강서(江西)의 학문은 한가롭게 세월이나 보내는 자들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고 응수했고, 조식의 문인 김우옹(金宇옹)의 비슷한 비판에 대해서도 “강서의 학문이 정신적으로 깨달은 장점은 쉽사리 감출 수 없어서 옛 성현들도 취했던 것”이라고 답했다. 강서의 학문이란 남송의 육구연이 강서 금계(金溪) 출신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인데, 육구연과 왕양명의 학문을 통칭한 육왕학(陸王學)의 별칭으로 쓰이기도 했다. 요컨대 유성룡은 양명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주자학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양명학의 유용성을 굳이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양명학의 장점을 취하려 했던 유성룡의 개방적 학문 태도는 관리로서 실무를 처리하는 정책적 유연성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유성룡은 25세 때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권지부정자(종9품)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 후 유성룡은 정9품직인 예문관 검열, 춘추관 기사관을 거쳐, 28세 때부터 정6품직인 성균관 전적, 공조 좌랑, 사헌부 감찰,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이조 좌랑, 병조 좌랑 등을 두루 역임했다. 35세 때부터는 정5품직인 홍문관 교리, 사간원 헌납, 의정부 검상을 지내다가 정4품직인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등을 지냈고, 38세 때부터 정3품직인 홍문관 직제학,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승정원 도승지, 홍문관 부제학 등을 지냈다. 47세 때부터는 정2품직인 형조 판서, 병조 판서, 이조 판서 등을 지냈고, 49세 때 의정부 우의정(정1품)에 임명되었다. 50세 때는 좌의정(정1품)으로 승진했는데, 이때 형조 정랑(정5품)이던 권율(權慄)과 정읍 현감(종6품)이던 이순신(李舜臣)을 각각 정3품직인 의주 목사와 전라좌도 수군절도사에 임명했다. 통상적인 절차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인사였지만, 결과적으론 유성룡의 사람 보는 안목과 미래를 예견하는 혜안이 입증되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의 일이다.

유성룡이 이처럼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며 조정의 주요 요직을 두루 거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실무 능력을 선조가 높이 샀기 때문이다. 그가 관리로서 보여준 탁월한 능력에 대해서는 임진왜란 때 그를 도와 업무를 처리했던 신흠(申欽)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재(吏才)란 문서를 처리하는 재주니 별로 귀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재상으로 이재를 갖추는 것 또한 어려운 일이다. 임진(壬辰)·계사(癸巳)년에 왜구가 국내에 깔렸고 명나라 군사가 성에 가득 차 있던 때에, 급한 보고와 통첩들로 내왕하는 문서가 매번 산더미처럼 밀렸다. 공(유성룡)이 관청에 들어오면 항상 속필인 나(신흠)에게 집필하도록 시켰는데, 입으로 부르면 글이 되었다. 여러 장의 글을 풍우같이 빨리 불러서 붓을 쉴 새 없이 놀려 쓴 글이었건만 고칠 것 없이 찬란한 문장이 되었다. 명나라에 보내는 자문(咨文)과 주문(奏文)도 마찬가지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재주였다.”

유성룡은 이황으로부터 극찬을 들을 정도로 학문도 성숙했지만, 관리로서 갖추어야 할 실무 능력도 뛰어났다. 그의 실무 능력은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맞아 전시 행정을 총괄하는 영의정으로서 그리고 군무(軍務)를 책임지는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위기를 관리하는 과정에서 탁월하게 발휘되었다. 물론 임진왜란은 유성룡 이외에도 수많은 전쟁 영웅들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유성룡은 그들과 다른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쟁을 치렀다. 그것은 기록과의 전쟁이었다. 그는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많은 첩보 보고와 전략 기획, 정책 제안 등을 작성했고, 그것들을 모아 ‘근폭집(芹曝集)’, ‘진사록(辰巳錄)’, ‘군문등록(軍門謄錄)’에 수록했다. 모두 후세들에게 자신이 겪은 전쟁의 교훈을 남겨주기 위한 것이었다. 유성룡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그것은 ‘징비(懲毖)’였다. 징비는 ‘시경(詩經)’ 주송(周頌) 소비장(小毖章)에 나오는 “나의 오늘 잘못을 징계하여 뒷날의 환난(患難)에 대비한다(予其懲而毖後患)”는 구절에서 가져왔다. 그 징비의 뜻을 모아 전란의 전모를 기록한 책이 바로 ‘징비록(懲毖錄)’이다.

유성룡은 ‘징비록’을 애국심으로 썼다. 그러나 ‘징비록’에 담긴 애국심은 그만의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것이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5월 기사에 유성룡의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임금의 수레가 우리나라 밖으로 한 걸음만 떠나도 조선은 우리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징비록’ 서문에서 임금이 수도를 버리고도 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하늘이 도왔기 때문이고, 백성들의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썼다.

그러나 애국심은 정쟁 앞에서 무력했다. 1598년 9월 정유재란이 끝나갈 무렵 북인들은 유성룡을 두 가지 이유로 탄핵했다. 하나는 유성룡이 변무(辨誣·무고를 변명함) 사행(使行)을 거부했다는 것이다. 변무할 내용은 조선이 일본과 결탁해 요동을 차지하려 한다는 명나라 사신 정응태(丁應泰)의 허위 보고였다. 다른 하나는 유성룡이 일본과 화친을 주장해 나라를 그르쳤다(主和誤國)는 것이다. 유성룡의 입장에서는 변명거리도 안 되는 정치적 구실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결국 유성룡은 진실을 가리지 못한 채 그해 11월 19일에 파직되었다. 같은 날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후 전사했다. 12월에 그는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전쟁의 기록을 정리했다. 

유성룡은 후세에 교훈을 주기 위해 전쟁을 기록했지만, 그 교훈을 망각한 조선은 북으로부터 시작된 또 다른 전란을 맞아야 했다. 그것은 역사의 교훈을 망각한 민족에게 닥친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문화일보 2015년 2월 17일자 24면 10회 참조)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