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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2-08 10:36
제목 [문화일보] 자기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직언… 정치신념 지킨 ‘지식인 표상’

<지식카페>
자기 돌보지 않고 임금에게 직언… 정치신념 지킨 ‘지식인 표상’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⑦ ‘개혁정치 4년 천하’ 조광조

중종 12년(1517), 정몽주가 조선에서는 처음으로 문묘에 종사됐다. 문묘는 국가 공인 지식인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조선 건국을 거부했고, 조선을 위해 단 하루도 살지 않았던 정몽주가 어떻게 조선의 문묘에 종사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전적으로 조광조(1482∼1519)의 노력 덕분이었다. 조광조는 어떤 인물이었고, 무슨 이유에서 정몽주의 문묘 종사를 주도했을까? 어려서부터 남달랐던 조광조의 인물됨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이 있다.

김굉필이 꿩 한 마리를 구해 어머니께 보내려고 말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만 애써 말린 꿩고기를 고양이 새끼가 물고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화가 난 김굉필이 여종을 꾸짖는데, 말과 기색이 몹시 지나쳤다. 옆에서 이 광경을 목격한 조광조가 스승 앞에 나아가 말했다. “어머니를 봉양하려는 선생님의 정성은 비록 간절하오나, 군자는 말과 기색을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자가 적이 마음에 의심되는 바가 있어 감히 말씀드립니다.” 결국 김굉필이 얼굴을 붉히며 제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나도 방금 스스로 뉘우치긴 했건만, 부끄러운 줄 미처 깨닫지 못했구나. 네가 내 스승이지 내가 네 스승이 아니로다.”

무오사화가 일어난 연산군 4년(1498) 조광조가 17세 되던 해의 일화다. 김굉필은 무오사화에 연루돼 평안도 희천에 유배와 있었고, 조광조는 희천 인근의 어천(魚川) 찰방(각 도의 역참을 관리하던 종6품 외관직)으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와 김굉필의 문하에서 ‘소학’을 익히고 있었다. 할 말은 하고야 마는 고지식한 성품을 그의 삼촌 조원기도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광조가 성균관 추천으로 천거됐을 때, “위태로운 말과 지나친 교만으로 몸을 해치고 낭패를 볼 수 있으니 경계하라”고 충고했다.

조광조는 중종 5년(1510)에 진사 시험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중종 10년에 종이 만드는 관청인 조지서(造紙署)에 종6품의 사지(司紙)로 천거됐다. 그러나 천거로 관직에 임명된 그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소학 한 권을 읽고 사지 공명(功名)을 저절로 얻었다.” 소학 정신에 충실했던 김굉필과 그의 제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함축된 표현이었다. 결국 조광조는 조지서 사지에 임명된 지 두 달 뒤 열린 알성시(謁聖試)에 급제해 자존심을 회복했다.

조광조가 치른 알성시는 중종이 독자적인 왕권 행사를 위해 마련한 시험대였다. 반정(反正) 공신들의 위세에 눌려 있던 중종이 재위 10년 만에 지지 세력을 모으기 위해 알성시를 개최한 것이다. 그래서 알성시 책문(策問)의 주제도 반정 10년간의 지지부진한 정치를 극복할 대책을 강구하라는 것이었다. 중종의 요구에 대한 조광조의 답변은 명쾌했다. 답변의 핵심은 정치의 말단을 추구하지 말고 근본을 확립해야 하며, 이를 위해 군주의 도덕적 솔선수범이 백성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광조의 답안은 중종의 의도를 정확히 꿰뚫었고, 급제 후 곧바로 성균관 전적(典籍)과 사헌부 감찰(監察)을 거쳐 중종 10년 11월 20일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됐다. 그런데 조광조는 정언에 임명된 지 이틀 만에 돌연 사직 소(疏)를 제출했다. 임금의 구언(求言)에 따라 상소를 올린 담양 부사 박상(朴祥)과 순창 군수 김정(金淨)의 처벌이 부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두 사람의 상소는 반정 3대장으로 알려진 박원종, 유순정, 성희안 등이 반정 초기에 왕비 신 씨의 아버지 신수근을 제거한 후,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중종 비 신 씨의 폐위를 주도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상소가 올라온 것은 중종 10년 8월 8일이었고, 논란 끝에 두 사람이 각각 남평과 보은에 유배된 것은 8월 24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유배가 결정된 지 석 달 뒤인 11월 22일에 조광조가 사간원 정언 직을 사퇴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반정 3대장의 위세에서 벗어나려 했던 중종의 암묵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조광조가 사직 소에서 언급한 사퇴의 변은 언로(言路)를 보호해야 할 대간(臺諫)이 임금의 구언에 따른 상소를 문제 삼아 당사자를 처벌하고자 하니, 본분을 망각한 대간과는 함께 근무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말단 언관이 올린 상소의 파장은 결국 조광조를 제외한 사헌부와 사간원의 대간 전원을 교체하고, 박상과 김정을 다시 기용하는 것으로 종결됐다. 그리고 조광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사림 전체의 공론을 이끄는 주역으로 부상했다.

이후 조광조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고, 중종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자신이 믿는 정치의 원칙을 중종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조광조에게 있어 바른 선비란 임금의 뜻을 거슬러 원망과 노여움을 사더라도, 자신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이었다. 조광조가 염두에 둔 바른 선비의 전형은 송 태조 조광윤을 도와 건국을 주도한 조보였다.

조보는 송 태조의 권유로 ‘논어’를 배우기 시작해 “절반으로는 태조를 도와 천하를 안정시켰고, 나머지 절반으로는 태종을 도와 태평을 이룩했다”고 평가된 인물이다. 조보는 성격이 강직해 송 태조에게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관철시킨 일화로 유명하다. 한 번은 조보가 천거한 인물을 송 태조가 받아들이지 않고 천거한 문서마저 찢어버리자, 다음 날 그것을 꿰맞추고 다시 천거해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또 한 번은 송 태조가 싫어하던 인물을 천거해 송 태조가 문을 닫고 들어가 버리자, 궁문을 지키고 서서 끝내 자신의 뜻을 관철시킨 일도 있었다. 조광조는 중종 13년(1518) 5월에 열린 조강(朝講)에서 조보의 일화를 장황하게 언급했다. 임금의 권력 앞에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던 조보처럼 조광조 역시 자신이 믿던 정치의 원칙을 중종에게 관철하고자 했던 것이다.

임금의 전폭적인 지지를 확인한 조광조와 신진세력은 중종 12년 8월 5일부터 반정의 시대 정신을 상징할 인물 선정 작업에 착수했다. 이때 이들이 문묘 종사 대상자로 거론한 인물에는 태종 때 이미 복권된 정몽주와 함께 성삼문과 박팽년도 포함돼 있었다. 세조에게 저항하다 희생당한 성삼문과 박팽년이 반정의 시대 정신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종반정의 직접적 원인은 세조의 왕위 찬탈이 아니라 연산군의 폭정이었다. 따라서 반정 정신의 표상을 세우기 위해서는 폭정에 희생된 자들을 추모해야 했다. 이 점에서 김종직은 무오사화 때 부관참시된 폭정의 희생자이자 조의제문(弔義帝文)을 통해 ‘충분(忠憤·충성심에서 비롯된 분한 마음)’ 의식을 드러낸 저항 정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조광조와 신진세력은 김종직에 대한 비판 여론을 의식한 정치적 부담감 때문에 그를 직접 거론하지 못했다. 대신에 그들은 김종직의 애제자라는 이유로 사화에 희생된 김굉필을 선택했다. 조광조의 스승인 김굉필을 대안으로 선택함으로써 김종직에서 시작된 반정 정신이 김굉필을 거쳐 조광조에게 계승됐다는 정치적 효과를 노린 전략이었다. 문묘 종사 대상으로 성삼문과 박팽년을 지목한 지 이틀 만인 8월 7일의 결정이었다.

일단 당론이 결정되자, 조광조 세력은 연이은 상소로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압박했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는 반대 세력의 의혹도 커져 갔다. 8월 7일자 ‘중종실록’은 이러한 정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그들의 뜻은 김굉필을 종사하고 그것을 빙자해 당을 세우자는 데 있었고, 애초에 정몽주를 위해 계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결국 정몽주와 김굉필의 문묘 종사를 재론하라는 중종의 전교에 따라, 8월 20일에는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성사시키되 김굉필의 경우는 논의를 미루는 것으로 가닥을 잡아갔다. 그 후 김굉필의 종사 문제는 더 이상 지속되지 않은 상태에서 9월 17일 정몽주의 종사만 결정됐다. 김굉필의 종사에는 실패했지만, 충성의 상징으로 공인된 정몽주를 조선 지식인의 표상으로 세우는 데 성공한 것이다.

조광조는 정몽주 종사의 여세를 몰아 중종 13년에는 소격서를 혁파했고, 14년에는 현량과를 실시했다. 그리고 그해에 중종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국공신(靖國功臣) 개정 작업에 착수했다. 중종을 압박해 정국공신을 개정하라는 요구가 자정까지 이어진 날도 있었다. 조광조의 집요한 설득에 지친 중종이 몸을 비트느라 용상에서 삐거덕 소리가 났다는 전언이 있을 정도였다. 결국 11월 11일 조광조는 중종으로부터 반정에 기여하지 않은 공신 76명을 삭훈(削勳)하라는 명령을 받아냈다. 100여 명의 공신 중 4분의 3을 물갈이한 것이다.

그러나 정국공신 개정은 조광조에게 돌아올 수 없는 다리가 됐다. 이 지시가 내려진 지 나흘 만에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한 것이다. 사화 발생 직후 중종은 조광조의 고신(告身)을 박탈하고 원방(遠方)에 안치하는 처분을 내렸다가 12월 16일 유배지 능주에서 사사(賜死)했다. 조광조는 사약을 받는 순간까지도 단충시(丹衷詩)를 남기며 충성심을 지켰지만, 중종은 조광조의 죽음을 전혀 슬퍼하지 않았다. 중종의 사사 결정을 기록한 사관은 중종의 태도 변화를 “예전에 총애하던 것에 비하면, 마치 두 임금에게서 나온 일 같다”고 평가했다. 

중종은 공신세력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조광조와 신진세력을 기용했지만, 오히려 그들은 자신들의 학문과 도덕 정신을 무기로 왕권의 일탈을 교정하려 했다. 게다가 조광조는 “간언하는 선비는 먼저 군주의 총애를 확인해야 한다”는 한비자의 충고마저 외면했다. 당시의 일을 기록한 사관도 “임금에게 이이(이이)한 성색(聲色)이 있다면 곧 물러났어야 했다”고 평가했다. ‘이이’란 자존심이 강해서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결국 조광조는 집요한 압박으로 자존심 강한 중종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화를 자초하고 말았다. 그러나 조광조는 선조 원년(1568)에 영의정으로 추증됐고, 광해군 2년(1610)에 문묘에 종사됐다. 정계에 몸담은 것도 4년 남짓에 불과했고 뚜렷한 학문적 업적도 남기지 못했지만, 정치의 원칙을 지키려 했던 그의 신념이 재평가된 것이다. 정계에서 활약하는 오늘날의 지식인이 되새겨야 할 대목도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문화일일보 10월21일자 24면 6회 참조) 

연세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