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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21 15:18
제목 [문화일보] 宮지기에서 두 王의 장인으로… 칠삭둥이의 ‘무한 권력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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宮지기에서 두 王의 장인으로… 칠삭둥이의 ‘무한 권력욕’

▲ 일러스트 = 전승훈 기자 jeon@munhwa.com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⑤ 성찰 없는 지식인 한명회

한명회(1415∼1487)는 조선왕조실록에 2300여 회나 이름이 등장할 정도로 세간의 주목을 오래도록 받았던 인물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그에게는 남다른 출생 신화도 따라다녔다. 어머니 배 속에서 일곱 달 만에 태어났고, 배 위에 난 검은 점은 태성(台星)과 두성(斗星)을 닮았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태성은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자미성(紫微星) 주위의 세 별로 삼공(三公)에 비유되고, 두성은 북두칠성으로 장수를 주관하는 별로 믿어졌다. 칠삭둥이였지만, 재상의 자질을 타고났다는 역설적 운명을 신화로 미화한 것이다. 한명회는 명나라에 가서 조선이란 국호를 받아온 한상질(韓尙質)의 손자였고, 아버지는 아들 덕에 영의정으로 추증된 한기(韓起)였다. 조선 최고 명망가의 손자로 태어났건만, 집안 식구들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던 칠삭둥이는 해진 솜옷으로 그를 보듬었던 늙은 여종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어릴 적엔 일찍 부모를 여의어 가난했기에 자신의 힘만으론 모진 세파를 헤쳐가기 어려운 곤궁한 처지에 내몰렸다.

고립무원이었던 한명회는 슬하에 아들이 없던 종조(從祖) 한상덕(韓尙德)에게 맡겨졌다. 한명회가 장차 가문의 천리마가 될 재목임을 간파하고 데려다 길렀기 때문이다. 한명회는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해지고 거동도 자태를 갖추어갔다. 서거정(徐居正)은 한명회가 얼굴이 잘생기고 체구가 커서 바라보면 우뚝하여 눈에 띄었다고 묘사했다.

젊은 시절 한명회는 글공부에 매달려 과거에도 여러 번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러나 그는 선비의 궁달(窮達)은 운명에 달려있다고 믿으며 낙방에 연연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권람(權擥)과 의기투합해 산천을 유람했다. 한명회가 권람과 특별히 가깝게 사귈 수 있었던 것은 둘의 처지가 매우 비슷했기 때문이다. 권근(權近)의 손자였던 권람은 부인을 박대하던 아버지 권제(權제)에게 눈물로 호소하다 도리어 매질을 당하게 되자 집안을 등지고 한명회와 함께 유랑 길에 나섰던 것이다.

과거에 거듭 낙방했던 한명회의 첫 관직은 문종 2년(1452) 38세의 늦은 나이에 문음(門蔭: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리로 임명되는 것)으로 얻은 개성의 경덕궁지기(敬德宮直)였다. 경덕궁은 이성계의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거처하던 곳)였으니 한명회와 왕실의 묘한 인연은 이미 이때부터 얽히기 시작했다. 한명회는 경덕궁지기로 있을 때 개성 관원들이 맺은 계(契)에 참여하고자 했으나 박대당한 적이 있었다. 나중에 그가 권세를 누리게 되자 계원들은 때늦은 후회를 했고,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은 하잘것없는 세력을 끼고 남을 멸시하는 자를 송도계원이라며 조롱했다.

한명회는 권람에게 문장과 도덕은 자신이 뒤지지만 일을 꾸미는 데는 뒤지지 않는다고 호언하기도 했다. 권람은 이런 한명회의 자질을 믿고 그를 수양대군에게 소개했다. 문종 1년(1451)에 권람이 수양대군을 도와 병서(兵書) 편찬 작업에 참여했는데, 일 년 뒤 단종 즉위년(1452)에 한명회를 수양대군의 책사(策士)로 알선했다. 물론 그것은 한명회도 내심 바라던 바였다. 일찍이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새로운 임금감으로 지목하고 속내를 드러낸 적이 있었는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권람이 한명회를 추천했던 것이다.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 1년(1453) 10월 10일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며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고, 무사 홍달손(洪達孫) 등 30여 명을 추천했던 한명회는 군기시(軍器寺) 녹사(錄事)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정3품)가 되어 일약 당상관이 되었다. 이때부터 한명회는 거침없이 질주하듯 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세조가 즉위한 직후에는 좌부승지를 거쳐 우승지에 임명되었고, 세조 2년(1456) 성삼문(成三問) 등의 단종 복위 기도를 제압한 이후에는 좌승지를 거쳐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했다. 그리고 마침내 세조 12년(1466) 영의정에 임명되어 일개 궁지기 출신이 14년 만에 정승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한명회를 빼고서는 세조의 치세 14년을 논할 수 없었기에 세조도 늘 한명회를 자신의 장자방(張子房)으로 대우했다.

한명회는 고속 출세를 위해 자신의 두 딸을 왕실에 출가시켜 두꺼운 혼맥(婚脈)을 맺기도 했다. 그는 세조 6년(1460)에 자신의 셋째 딸을 당시 세자였던 예종에게 출가시켰다. 자신의 딸을 세자에게 출가시켜 유력한 왕위 계승 후보자의 후견인이 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장순왕후로 추존된 그녀는 세조 7년에 17세로 요절했고, 그녀가 낳은 원손 인성대군마저 세조 9년에 요절했다. 자신의 딸과 외손자가 모두 예종이 즉위하기 전에 요절했기 때문에 그의 정치적 입지도 불안정해졌다. 그러자 그는 세조 13년(1467)에 넷째 딸을 다시 자산군에게 출가시켰다.

하지만 당시에는 자산군의 왕위계승을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원래 세조의 슬하에는 요절한 의경세자와 예종이 있었고, 의경세자도 월산대군과 자산군 두 아들을 두었다. 적장자 왕위 계승 원칙에 따른다면, 예종의 적자인 제안군이나 의경세자의 맏아들인 월산대군에 비해 자산군은 최적의 왕위 계승 후보자는 아니었다.

게다가 한명회는 자신의 넷째 딸을 자산군에게 출가시킨 그 해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연루되어 일생일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다. 당시 함길도 길주의 토호로 회령부사를 지낸 이시애는 함길도 절도사 강효문(康孝文)을 반란 모의 혐의로 죽이고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강효문과 내통한 정황을 조정에 보고했다. 보고를 접한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의 반역 연루설은 부인했지만, 백관의 수장으로 의혹의 당사자가 된 점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어 신숙주는 의금부에 감금하고 한명회는 가택 연금시켰다. 물론 세조는 한명회와 신숙주를 구금한 지 보름 만에 석방했지만, 그들이 공로를 믿고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혐의는 분명히 지적하고 넘어갔다. 세조는 이들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는 것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이다.

다만 세조는 문제가 더 이상 확산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다. 정창손(鄭昌孫) 등이 한명회와 신숙주의 처벌을 거듭 요구했지만, 세조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그들에 대한 처벌은 정권의 근간을 뒤흔드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결국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시애의 난’ 평정 뒤 단행된 적개공신 책봉에서는 배제되었지만, 원상(院相)으로 중용되어 정치 현장에 복귀했다.

세조 치세 말년에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았던 한명회는 예종이 재위 1년 2개월 만에 급서(急逝)하자 자산군의 왕위 계승에 깊숙이 개입해 재기를 노렸다. 예종의 살아있는 아들 제안군을 제치고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산군이 왕위를 잇게 된 배경에는 세조비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절대적인 지원이 있었다. 이들은 예종이 승하한 날 전격적으로 자산군을 후사로 결정했고, 한명회의 넷째 딸은 공혜왕후로 책봉되었다.

정희왕후와 한명회의 후원으로 13세에 임금이 된 성종은 성년이 될 때까지 7년 동안 수렴청정과 원상들의 견제 때문에 독자적으로 왕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성종이 온전히 왕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길을 터준 인물은 정희대비였다. 그녀는 성종이 성년을 맞은 해 정월에 철렴(撤簾) 의사를 표명했고, 원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의지를 관철시켰다. 정희대비가 철렴을 발표하자 한명회는 주상의 무위(無爲) 정치는 대비의 보호와 지도에 힘입은 것이라며 철렴 철회를 주장했다. 그러나 정희대비의 수렴청정으로 무위 정치가 가능했다는 발언은 성종의 친정(親政)을 부정하는 반역적 언사로 읽힐 소지가 충분했다. 대간들은 이 발언을 문제 삼아 한명회를 탄핵했고, 결국 한명회는 지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한명회는 집요했다. 그는 자신의 정치 생명을 연장할 돌파구를 대명외교에서 찾아냈다. 기회는 성종 9년(1478) 8월에 찾아왔다. 당시 조선 조정은 명나라의 요청에 따라 건주위의 여진족 토벌에 어유소(魚有沼)를 파견했는데, 그는 압록강 도강을 포기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한명회는 병력 해산에 반대하며 다시 출병할 것을 요청했고, 그 공로로 성종에게 후한 상을 받고 재기의 발판도 마련했다.

성종 11년 5월에는 명나라가 정동(鄭同)을 사신으로 파견해 조선의 건주위 정벌 협조를 치하하며 한명회를 사신으로 파견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동은 한확(韓確)의 여동생이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뽑혀갈 때 환관으로 선발된 자였지만, 한 씨의 후광으로 성종 때에만 세 차례나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정동은 한명회를 자신의 집에서 접대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친분을 과시했지만, 친분은 한명회에게 독이 되어 돌아왔다. 사달이 난 것은 정동이 다시 조선에 파견된 성종 12년 6월이었다. 이때 한명회는 정동을 자신의 정자 압구정(狎鷗亭)에 초대하며 정자가 좁아 더우니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쓰겠다고 요청했다. 이에 성종은 압구정이 좁다면 사신을 제천정(濟川亭)에서 접대하라고 명했지만, 한명회는 아내의 묵은 병을 핑계로 행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자 성종은 한명회가 오랜 사행도 마다하지 않았는데 한나절 행사에 아내의 병을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것은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한명회의 직첩을 거두고 도성 밖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했다. 실제로 한명회를 도성 밖으로 쫓아내지는 못했지만, 성종은 이 일을 계기로 한명회의 권력을 견제하는 것이 독자적인 왕권 행사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압구정에는 성종도 시를 지어 하사했고, 조정의 문사들이 예찬한 시도 수백 편이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포의(布衣) 이윤종(李尹宗)이 기록한 다음과 같은 시도 있었다.



정자를 지었으나 돌아가지 않았으니

(有亭不歸去·유정불귀거)

이 인간 참으로 갓 쓴 원숭일세

(人間眞沐후·인간진목후)



그 후 한명회는 성종 14년에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한 차례 더 명나라 사행을 다녀왔고, 70세 때는 성종으로부터 궤장(궤杖)을 하사받고 7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그러나 성종의 계비(繼妃) 윤씨 폐출을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되었고 중종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그의 권력을 향해 질주하던 삶은 밀랍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 태양열에 날개를 잃고 추락했던 이카로스를 연상시킨다. (문화일보 8월 26일 24면 4회 참조)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