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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21 15:18
제목 [문화일보] 성균관 유생 출신 승려 기화, 儒敎 - 佛敎 접점을 찾다
<지식카페>
성균관 유생 출신 승려 기화, 儒敎 - 佛敎 접점을 찾다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 ④ 조선 불교의 세속화와 승려 기화의 선택

신라는 오백 년 동안, 고려도 오백 년 동안 불교 국가였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은 단숨에 불교를 버리고 유교 국가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까? 언뜻 유교 국가 조선의 탄생은 유학자들이 거둔 승리의 결과로 보인다. 그러나 비밀의 열쇠는 유교가 아니라 불교에 있었다.불교는 세간(世間)이 아니라 출세간(出世間)을 지향하는 종교다. 카필라 왕국의 태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출가를 결심했을 때부터 불교는 세속의 권력을 거부했다. 이런 부처의 깨달음을 전파하는 집단을 승가(僧伽·sangha)라고 한다. 이들의 모토는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의 말씀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평생 고독한 수행자의 길을 간다는 뜻이다. 그러나 승려들은 명상과 해탈에만 매달려서는 안 된다.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세속과 접촉해야 한다. 게다가 출가한 수행자는 생산에 참여하지 않기 때문에 교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속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 명상과 해탈은 이판(理判)의 문제이고, 세속의 사무는 사판(事判)의 문제다.

부처의 가르침을 올곧게 실천하려면 이판과 사판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이판과 사판에 대한 설명이 없지만, 이판승과 사판승에 대한 설명으로도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이판승은 속세를 떠나 수도에만 전념하는 승려이고, 사판승은 절의 재물과 사무를 맡아 처리하는 승려다. 이판과 사판의 관계를 잘 정리하지 않으면, 막다른 데 이르러 어찌할 수 없게 되는 ‘이판사판’의 지경이 된다.

이판과 사판의 관계를 잘 정립하기 위해서는 불교 교단의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인도에서는 불교 교단의 정치적 독립성을 보장해 주는 전통이 대체로 잘 이어졌다. 인도에서는 왕이 천민 출신의 승려에게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야 했다. 불교 교단의 권위가 세속의 정치적 권위보다 우월했던 것이다.

중국에서도 동진(東晉·317∼420)이 지배하던 남중국에서는 불교 교단의 정치적 독립성이 비교적 잘 보장되었다. “사문(沙門)은 왕에게 예경할 필요가 없다(沙門不敬王者)”는 담론이 확립될 정도였다. 반면에 5호 16국이 난립하던 북중국에서는 포교에 정치권력의 후원이 필요했다. 그 결과 북조에서는 사문의 국왕에 대한 예경을 강조했고, “국왕이 곧 부처(王卽佛)”라는 관념이 보편화되었다. ‘왕주교종(王主敎從)’을 지향하는 북조 불교는 수나라에 계승되어 중국 불교의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북조 불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삼국시대 한국 불교도 전래 초기부터 세간과 국가를 강조하는 호국 불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구려를 통해 불교가 전래된 신라도 마찬가지였다. 신라는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를 통해 불교를 처음 접했다. 묵호자는 승려의 이름이 아니라 검은 피부를 가진 이방인이란 뜻이다. 신라에서 포교하던 묵호자는 공주의 중병을 고치고 홀연히 사라졌다. 소지왕(재위 479∼500) 때도 묵호자를 닮은 승려 아도가 신라에 들어와 포교하다 앓지도 않고 죽었다. 이방인 승려들이 포교를 목적으로 국왕에 접근해 기이한 행적을 남겼지만 파장은 크지도 오래가지도 않았다.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된 것은 눌지왕 사후 70년 만인 법흥왕 15년(528)이었다. 널리 알려진 불교 공인의 계기는 ‘이차돈 순교’라는 신화였다. 신화의 골자는 왕명을 사칭해 사찰을 건립한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 목에서 흰 피가 한 길이나 솟구쳤고 하늘에선 꽃비가 내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순교의 기적은 불교 공인으로 이어졌다.

원래 순교라면 종교 탄압에 저항하다 희생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법흥왕은 불교를 탄압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인했다. 법흥(法興)이란 왕명도 불법(佛法)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을 종합해 보면, 이차돈 순교의 이면에는 정치적 복선이 깔려 있었다. 법흥왕은 재위 7년(521)에 율령을 반포하고 국가 개혁에 나섰지만, 신라를 지배하던 6부족 연맹체 수장들은 법흥왕의 독주에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결국 법흥왕은 천손(天孫) 신앙을 가진 6부족의 영향력을 제어하기 위해 불교의 위력을 활용하기로 결심했다. 이때 법흥왕의 측근 이차돈이 묘책을 제시했다. 자신이 천손 신앙의 성지인 천경림(天鏡林)에 사찰을 건립할 테니, 자신을 왕명 사칭죄로 처형해 왕권에 저항하는 신하들을 일벌백계로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법흥왕은 밀약에 따라 이차돈을 처형했고, 순교의 기적은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키는 정치적 효과를 거뒀다. 물론 불교도 공인되었다.

그 후 불교는 신라의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고, 고려 때는 대장경 간행을 통해 거란과 몽골의 침략에 맞설 정신적 원동력을 제공했다. 불교는 신라와 고려를 거치면서 국가 종교로 발전했고, 그에 따라 승려들의 위상도 높아졌다. 그러나 국가의 정치적 목적에 동원되어 누렸던 세속적 번영은 결국 세속적 타락을 동반했다. 불교계의 자정(自淨)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권력과 결탁한 교단은 세간과 출세간의 경계를 넘나들며 물의를 일으켰다.

타락한 불교가 이끄는 고려의 미래는 밝지 않았다. 적어도 성리학에 주목한 젊은 지식인들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성리학자들의 좌장이었던 정몽주는 불교가 음식남녀(飮食男女)와 같은 일상의 진리를 거부한다고 비난했다. 조선 건국의 주역 정도전도 불교가 남녀의 동거를 옳지 않다고 여겨 인륜에서 멀어졌고, 농사짓기를 거부해 생산의 근본을 끊어버렸다고 비판했다. 한마디로 불교는 경제와 역사 발전에 기여하지 않는다는 비판이었다.

성리학자들의 신랄한 비판에 맞선 불교 측의 반론은 거의 전무했다. 유일한 예외가 세종 때 활약한 승려 기화의 반론이었다. 기화는 원래 성균관 유생이었는데, 21세 때 친구의 죽음을 목격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껴 출가했다. 기화는 이성계의 왕사 무학(無學)에게 배웠고 무학은 나옹(懶翁)의 제자였다. 기화는 나옹에서 무학으로 이어지는 선종 학맥을 계승한 셈이다.

그러나 기화는 세속과 완전히 동떨어진 은둔적 구도자의 삶을 추구하진 않았다. 기화는 세종 때 왕실과 접촉하며 성리학자들의 공세에 대응할 정치적 발판을 확보했다. 세종이 호불(好佛)의 군주였던 것도 도움이 되었다. 세종은 수양대군에게 부처의 일대기인 ‘석보상절’을 간행케 했고, 자신이 직접 부처의 공덕을 찬양한 ‘월인천강지곡’을 짓기도 했다. 기화가 불교를 옹호하기 위해 ‘현정론’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정치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았다.

현정이란 파사현정(破邪顯正)을 줄인 말이다. 사도(邪道)를 깨뜨리는 것이 가장 효과적으로 정도(正道)를 드러내는 길이란 뜻이다. 기화는 성리학자들의 불교 비판이 한창 기승하던 시절 ‘현정론’을 써서 그들의 비판에 맞섰다. 핵심적 내용은 불교도 세속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방식은 불교의 세속적 효용성을 유교 논리에 짜맞추어 입증하는 보유론(補儒論)이었다.

기화는 우선 불교가 무부무군(無父無君)의 종교라는 비판에 대해 해명했다. 기화도 충효가 신하와 자식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라는 점을 인정했다. 다만 기화는 불교의 충효는 세속의 충효와 다르다고 했다. 예컨대 부처의 출가는 세속의 관점에선 불효지만, 부모를 해탈의 세계로 인도했기 때문에 진정한 효도가 되었다고 했다. 기화는 불교가 나라와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대해서도 반박했다. 그는 승려들이 향을 피우고 등을 달아 임금과 나라를 위해 축원하는 것이 불교에서 충성을 실천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다음으로 기화는 승려들의 무위도식과 세속적 타락에 대해서도 해명했다. 그러나 기화의 답변은 상당히 군색했다. 기화는 불법을 전파하고 중생을 구제한 승려가 남의 봉양을 받는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게다가 기화는 자격 없는 승려들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서 너무 심하게 나무라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일부 승려들의 사소한 문제 때문에 불교계 전체를 매도할 필요는 없다는 주장이지만, 결국 기화는 승려들의 세속적 타락을 묵인한 셈이다.

기화는 성균관 유생 출신이었기 때문에 유학과 불교 경전에 모두 해박했다. 그래서 그는 유학 경전들을 인용해 불교와 유학에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불교 교리에서도 유학과 마찬가지로 세속적 효용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테오 리치(Matteo Ricci)가 중국에서 천주교를 효과적으로 포교하기 위해 유학과의 접점을 강조했던 것과 마찬가지 방식이었다.

현정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파사가 중요하다. 당시 기화에게 주어진 파사의 과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유학자들의 비판에 대응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불교계 내부의 문제를 직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보유론은 유학자들과의 대결을 성공적으로 이끌지 못했고, 기화는 불교 교단이 안고 있던 현실적 문제점들을 모두 외면했다. 기화는 출세간의 종교인 불교가 어떻게 세속의 문제에 개입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점들을 불교 교단은 어떻게 치유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답변하지 못했다. 그 결과 조선 초기의 유불논쟁은 유학자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결과는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현세의 이념인 유학이 출세간의 영역까지 장악하게 됨으로써, 유학은 더욱 배타적이고 교조적인 담론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문화일보 7월 29일자 24면 3회 참조)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