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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0-21 15:17
제목 [문화일보] 변절의 상징 권근? 분열의 시대 아우른 현실참여 정치인!
<지식카페>
변절의 상징 권근? 분열의 시대 아우른 현실참여 정치인!
최연식의 역사 이야기 (3) 권근,‘創業과 守成’ 유연한 정치원칙

“흰 머리 양촌도 의리를 말하니, 어느 시절인들 어진 이가 나오지 않겠는가!”

운곡 원천석이 양촌 권근을 기롱하며 한 말이다. 원천석은 한때 이방원을 가르쳤던 인연으로 여러 차례 태종의 부름을 받았지만, 끝내 거절하고 고려에 대한 절개를 지켰다. 그는 고려를 향한 자신의 변치 않는 충절을 이렇게 읊었다.



눈 마자 휘여진 대를 뉘라셔 굽다턴고

구블 절(節)이면 눈 속에 프를소냐

아마도 세한고절(歲寒孤節)은 너뿐인가 하노라



권근의 실절(失節)을 비난한 것은 원천석만이 아니었다. 조선 중기의 문인 신흠도 권근의 명성은 자손 대대로 고관을 배출한 가문의 번성 덕이라고 꼬집었다. 그렇다면 조선 최초의 문형(文衡)으로 당대 관학계를 이끌었던 권근에게 이런 부정적 평가가 따라다녔던 이유는 무엇일까?

권근의 명성이 자손들의 성공으로 유지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는 출신부터 남달랐다. 권근은 당대의 명망가 안동 권씨 자손으로, 그의 증조부 권보는 고려 조정에 ‘사서집주’ 간행을 건의해 주자학 보급에 기여했던 인물이다. 권보의 사위 이제현은 고려 구신(舊臣) 세력의 영수 이색을 가르쳤으며, 이색은 18세의 권근을 문과 급제자로 선발했던 좌주(座主·과거의 시험관)였다. 천한 피가 섞였다는 꼬리표를 평생 달고 다녔던 정도전과 달리, 권근은 명문가의 후예였으며 좌주-문생(門生) 관계로 결속된 든든한 정치적 배후를 두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권근의 행보는 가문과 학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고, 위화도 회군 이후에는 역사의 흐름을 번번이 역류하며 정치적 시련을 자초했다. 그의 대세를 거스른 정치적 오판은 1389년 6월 명나라 사행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당시 명나라 예부는 고려 사신 일행 편에 외교문서를 보내 신돈의 자손으로 알려진 우왕과 창왕의 잇따른 왕위 계승을 힐난했고, 권근은 이 문서를 귀국길에 개인적으로 뜯어봤다. 그리고 그해 9월 귀국 후에 이 문서를 창왕의 외조부인 이임에게 먼저 보이고 나서 도당에 보고했다. 창왕 보호 대책을 신속히 강구하려는 의도에서 취한 비상 조치였지만, 그것은 정상적 보고 절차를 위반한 명백한 월권 행위였다. 게다가 그해 11월 혁신세력에 의해 공양왕이 옹립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권근의 또 다른 판단 착오는 같은 해 10월에도 있었다. 이때 그는 창왕 옹립에 앞장섰던 이숭인이 대간의 탄핵을 받자 그를 변호하는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고려사절요’는 이 정황에 대해 “이숭인이 재주는 있지만 행실에 실수가 많았고, 권근이 구원한 말도 공평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평가했다. 사료를 정리한 조선 건국 세력의 관점에서 고려 구세력의 사적인 결탁을 꼬집은 것이다.

결국 권근은 이숭인과 편당했다는 죄목으로 황해도 우봉에 유배되었다가 12월부터 경상도의 영해, 흥해, 김해 등의 유배지를 전전했다. 유배 중이던 1390년 5월에는 이성계의 명나라 침공계획을 황제에게 허위 보고한 윤이·이초 사건에 연루되어 청주 옥(獄)에 갇혔다가 7월에 전라도 익주에 유배되었다.

1391년 3월에야 비로소 종편(從便·귀양에서 풀려나 서울 밖에서 사는 것)이 허락되어 충주 양촌에 은거하며 조선 개국을 맞았다.

기득권에 익숙했던 권근은 역사의 전환에 민감하게 반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공양왕이 일사천리로 옹립되었다는 소식을 유배지 우봉에서 듣고서는 그로 인한 좌절과 통분으로 반년간이나 벙어리처럼 지냈다. 그가 고독한 유배 생활을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는 학문뿐이었다.

익주에서 집필된 ‘입학도설’은 권근 자신의 표현대로 성리학 입문서이다. 그는 이 책에서 40개의 그림을 그리고 그림마다 해설을 붙여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에 대한 초학자들의 이해를 도왔다. 충주 양촌에서 집필한 ‘오경천견록’은 얕은 견해라는 뜻에서 ‘천견(淺見)’이란 제목이 붙어 있지만, 오경에 대한 조선 최초의 해설서로 권근의 학문이 사서 연구에 편중되어 있지 않다는 증거다.

그러나 사대부란 학문에만 안주하지 않는 정치가들이다. 모진 유배 생활을 견딘 권근도 내심 새 정치에 참여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못 이겨 마지못해 출사를 결심했다는 일화도 있지만, 1393년 2월 권근은 계룡산 행재소에 행차한 태조의 부름에 곧장 달려갔다. 그러고는 환조로 추대된 태조의 아버지 이자춘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 이성계 가문의 위대한 내력을 칭송했고, 조선 건국을 찬송하는 풍요(風謠·지방 풍속을 읊은 노래)도 지었다.

고려를 무너뜨린 새 왕조 조선에 대한 일종의 충성 서약이었던 셈이다. 태조의 부름에 응해 뒤늦게나마 조선 조정에 참여했지만, 권근은 개국 초기 몇 년을 침묵의 세월로 보냈다. 정세 판단과 정국 운영에서 입장 차이를 보인 혁신세력의 견제 때문이었다. 보수적인 권근이 안정적인 정국 운영과 현상유지적 대외정책을 표방했다면 혁신세력은 지속적인 제도개혁과 팽창적 대외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했다. 양측의 입장 차이가 첨예하게 드러난 사건이 표전(表箋·외교문서) 문제를 둘러싼 정도전과 권근의 대립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태조 4년(1395) 10월 조선이 하정사(賀正使)에게 들려 보낸 표전문이었다. 당시 명나라는 이 표전문에 경박하게 희롱하고 모멸하는 문구가 들어있다며, 문서 작성의 주모자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통보했다. 명나라는 정도전의 요동 공격 가능성을 미리 감지하고, 표전 문제를 빌미로 정도전 압송을 요구한 것이다.

문제가 발생하자 정도전은 자신이 55세 고령으로 복창(腹脹·배가 더부룩한 병)과 각기병을 앓고 있다며 압송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정도전의 불응은 권근에겐 절호의 기회였다. 권근은 태조 5년(1396) 7월 정도전을 대신해 사행을 자청했다. 그러자 정도전은 이색의 애제자 권근이 사행을 자청하는 것에 의혹을 품고 파견을 반대했다. 과거 이색은 명나라에 고려에 대한 보호와 감독(監國)을 요청한 바 있었는데, 권근에 의해 그와 같은 외세 의존적 외교정책이 부활하지 않을까 우려한 것이다. 결국 사행 임무를 맡은 권근은 다음해 3월 사태를 원만히 해결했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융숭한 대접까지 받고 돌아왔다. 권근이 지은 24수의 응제시(應製詩)가 바로 그 증거였다. 응제시란 황제가 낸 시제(詩題)에 따라 지은 시다. 권근이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하자 정도전은 곧바로 권근을 탄핵했다. 근거는 함께 파견된 정총 등은 모두 억류된 상태에서 권근만 무사 귀환했고, 귀국 뒤 황금을 사용하는 것으로 보아 권근과 명나라 황제 사이에 모종의 밀약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이었다. 그러나 황금은 태조가 출국 때 노자로 들려 보낸 것이었다.

정도전의 견제가 심했지만, 표전 문제 해결은 권근이 주목받을 수 있는 결정적인 기회였고 그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권근은 태조 6년(1397) 12월에 올린 상서에서 표전 문제 해결을 비롯한 여러 공로들을 열거하며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해 줄 것을 요청해 태조의 승인을 받아냈다. 그리고 태종 집권 직후에는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책봉되어 태종 정권의 정국 안정을 주도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절개를 저버렸다는 비난을 무릅쓰고 권근이 조선 조정에 참여했던 것은 도덕적 평가에 집착한 은둔만이 정치가의 도리는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은둔형 정치가와 참여형 정치가의 역사적 모범은 백이(伯夷)와 이윤(伊尹)이었다.

맹자의 평가에 따르면 백이는 “섬길 만한 군주가 아니면 섬기지 않고 부릴 만한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아서,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러워지면 물러나는” 인물이었다. 반면에 이윤은 “‘누구를 섬긴들 군주가 아니며 누구를 부린들 백성이 아니겠는가’라고 하면서, 다스려져도 나아가고 어지러워도 나아가는” 인물이었다. 백이는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렸고, 이윤은 천하의 무게를 자임했다고도 평가했다. 권근은 자신의 정치적 행보를 이윤과 동일시하면서 조선 조정에 참여한 것을 정당화했다.

하지만 권근이 정치윤리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권근은 창업(創業)할 때와 수성(守成)할 때 지켜야 할 정치의 원칙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창업할 땐 권도(權道)를 사용해 따르는 자에겐 상을 주고 따르지 않는 자에겐 죄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반면에 수성할 땐 전대 신하들의 절의를 포상해 후세의 신하들을 권면하는 정도(正道)를 사용해야 한다고 했다. 권근은 한때 정치가의 은둔을 직무유기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조선 출사를 정당화하기도 했지만, 태종 즉위 직후에는 정몽주와 길재의 절의를 포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성의 시대가 되었으니 고려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조선을 버린 그들을 조선 정치가의 표상으로 삼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정적 정도전을 반역 음모로 엮어 제압한 끝에 가까스로 집권에 성공한 태종의 문제의식과도 정확히 부합되었다. 그리고 태종은 재위 1년(1401)에 권근의 제안에 따라 자신이 살해한 정몽주에게 영의정부사를 증직했다.

왕조 교체의 갈림길에 선 정치가들에게 충성과 반역의 선택은 거역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정몽주와 정도전도 그들 앞에 닥친 숙명을 받아들였고, 그들의 선택은 각자의 삶을 비극적 종언으로 몰고 갔다. 반면에 권근은 극단적 선택을 피했다. 권근은 정몽주처럼 고려에 대한 절의를 끝까지 지키지도 못했고, 정도전처럼 조선 건국을 주도하지도 않았다. 대신에 권근은 절의정신을 수성 시대의 정치적 기준으로 제안해 충성과 반역으로 분열된 역사를 봉합하고자 했다. 권근은 태종 시대의 정치적 주역이었고 학문적 성과도 남달랐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지식인의 사당인 문묘에 종사되지 못했다. 형제 중 한 명이 승려였고 권근 자신이 불교에 비판적이지 않았던 점도 문제였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실절이라는 정치적 낙인을 끝내 지우지 못했기 때문이다.(문화일보 7월 1일자 22면 2회 참조)

연세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