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더니 거의 모든 곳이 푸른색으로 가득하다. 그 푸른 땅은 모두 사탕수수밭이다. 사탕수수농장과 이를 둘러싸고 사람들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곳, ‘사탕수수의 섬’ 필리핀 네그로스섬이다.
필리핀에 머무는 동안 운이 좋게 두레생협 민중교역회사인 에이피넷(APNet)의 경진씨를 따라 네그로스에 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사흘 동안 에이피넷에서 운영하는 <네그로스 프로젝트>를 신청한 마을을 필리핀 민중교역단체인 알터 트레이드(Alter Trade)의 생산자 지원 단체인 ATFI(Alter Trade Foundation) 활동가들과 함께 둘러보는 일정이다. 네그로스 프로젝트는 내가 속한 두레생협의 조합원들이 구매하는 마스코바도설탕에 포함된 기금으로 생산조직에게 자금융자를 하는 사업이라서 늘 방문해 보고 싶었다.
사탕수수 생산농민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오전 9시 숙소를 출발. 지역담당자인 텔마, 프로그램 디렉터인 마벨, 그리고 경진과 내가 탄 지프는 바콜로드시를 벗어나서 30분 정도 길을 달려 스페인사람들이 만든 도시인 머시아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스타콤펙 산타크루즈 생산자협동조합이 있는 마을로 가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차가 한 대 다닐 정도로 좁은 산길에 비가 와서 길이 파인 탓에 큰 돌을 지날 때마다 차가 좌우로 출렁거렸다. 작은 개울을 두 번 건너고, 울창한 대나무 숲과 아름다운 대나무집들, 싸움닭을 키우는 농장들을 지나 고지대 마을인 산타 크루즈에 도착했다.
숲 속에 대나무로 만든 마을회관이 있고, 우리는 나무그늘 아래 놓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10여명의 남녀 농민들(운영위원들이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텔마와 마벨은 이들과 아주 가까운 사이인 듯 자연스럽게 어우러졌고, 주민들은 자리를 오고가며 여기저기서 과일을 따다가 자리에서 잘라 놓는다. 딱딱한 회의를 생각했던 나로서는 이 여유로운 분위기가 새롭다.
이 마을에서는 주민 80가구 중 42가구가 산타크루즈 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해서 공동으로 사탕수수농사를 14헥타르 경작하고, 쌀과 과일, 채소, 염소와 닭을 기른다. 이제 새로이 커피를 공동재배할 계획을 세우고 자금융자를 요청하였다. 이들은 커피열매의 육질을 벗기고 햇빛에 말리는 커피건조시설을 만들면 기존보다 가격협상력도 높아지고, 고용창출과 시설이용수입이 생기리라 예상하고 있다. 커피가 자라는 땅 옆에 건조시설을 설치할 자리로 안내하며 설명을 할 때 이들의 표정은 매우 밝았다.
‘설탕’의 땅 네그로스에서 이들은 특별하다. 네그로스는 1856년 영국상인이 처음으로 사탕수수를 들여온 이래, 스페인지주들의 사탕수수 플란테이션농장이 전 지역을 지배해왔다. 그래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농장지시에 따라서 단순작업을 하던 ‘노동자’였지, 자신의 농사전체를 스스로 생각해서 결정하고 실행하며 평가하는 ‘농민’이 아니었다. 계절형 노동자인 이들은 사탕수수 일이 끝나면 도시에서 메이드일이나 막노동으로 돈을 벌기 위해 온가족이 흩어져 살아야 하는 불안정한 존재였다.
산타크루즈 생산자협동조합 농민들이 자기 토지를 매입하고, 생산자협동조합을 조직하고, 농지를 공동경영하며, 쌀과 야채, 가축을 기르게 되고, 일년 농사를 기획하는 훈련을 받고, 유기농법을 배우고 퇴비를 만들 수 있는 농민이 되며, 자신들의 새로운 사업을 기획할 수 있기 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이 커피사업이 스스로 기획한 첫 번째 사업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작고 보잘 것 없는 시설 하나를 설명하면서 자부심에 차서 얼굴을 빛낼 수 있었다.
둘째 날 우리는 바콜로드 남쪽의 라 까를로따시에 있는 산타리타 생산자협동조합으로 향했다. 마을은 대규모 마스코바도설탕 제당공장을 지나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우리는 공장 사설경찰의 검문을 받고서 마을로 들어갈 수 있었다. 마을에 들어가면서 보이는 무덤이 하나 있기에 무엇인가 물었더니 토지개혁과정에서 죽은 마을사람의 무덤이라고 한다. 비로소 이들이 현재까지 오는 게 쉽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산타리타는 현재의 네그로스 농업개혁의 과정이 얼마나 지난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다.
1984년 전 세계적으로 설탕가격이 하락하자 지주들이 수익이 나지 않는 사탕수수 플란테이션농장을 포기해버렸다.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어버린 농업노동자들은 심각한 기아상태에 빠졌고, 생존을 위해 파업으로 대응했지만 정부는 이들의 데모행렬에 총을 쏘았다. 사태가 극단적으로 번져가자 유니세프가 국제적 분쟁지역으로 선포하며 지원을 시작했다. 필리핀 국내에서도 민주적 농업개혁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었으며, 학생운동그룹이 지원에 뛰어들었다. 이에 힘입어 1988년 토지개혁법이 통과되었다.
한명의 대지주가 지배하던 이곳에서 1992년 지방정부는 토지개혁을 위해 564헥타르의 땅을 생산자들에게 분배하려 하였다. 이에 반대하는 지주 몰래 노동자들은 장이 서는 일요일마다 회의를 갖고 절차를 밟아 1999년 182명이 땅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지주는 이들은 협박하거나 구슬려서 조직을 탈퇴하도록 유도하였다. 그 결과 76명의 생산자들만 남아 날브 다목적생산자협동조합을 만들었다.
날브는 생산자들의 땅을 모아서 공동경작하기로 결정하고 초기 자금을 NGO단체에서 지원받았다. 그러나 지주는 농민들이 사탕수수밭에 들어가지 못하게 바리케이트를 치거나 사설 경비원을 고용하여 사탕수수를 생산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갈등은 계속되었고, 결국 1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마을입구의 무덤은 바로 그의 것이었다. 이런 공포상황에서도 농민들은 계속 싸웠으며, 아직도 분쟁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날브 생산자협동조합은 2003-4년 ATFI와 파트너쉽을 맺고 사탕수수 경작을 시작한 이래 급속히 안정되고 있다.
생산품의 무역을 담당하는 알터 트레이드(Alter Trade/AT)는 농업개혁을 안정화시키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들이 있어서 농민들은 해외의 공정무역단체들과 긴밀한 파트너쉽을 형성할 수 있었다. 유럽의 공정무역단체들과 일본의 생협운동진영이 조직한 Alter trade Japan이 주된 파트너이다. 한국은 2004년부터 두레생협에서 마스코바도 설탕교역을 시작했다. 남의 사회 내부 협력, 그리고 남과 북이 함께 만들어가는 새로운 모델이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이런 새로운 관계 속에서 삶을 변화시키는 농민의 모습이 어떠할까 늘 궁금했다. 그곳에서 돌아온 후 내게 네그로스농민들의 모습은 아이를 안고 활짝 웃는 얼굴, 조합의 텃밭이 성공했음을 이야기하며 야채로 차린 점심을 내놓는 뿌듯해 하는 모습, 빛나는 얼굴로 융자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는 당당함. 세계차원의 평등한 교류관계 속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확신에 찬 표정, 무엇보다 고개를 들고 상대를 또렷이 쳐다보는 살아있는 눈빛들로 떠오른다.
네그로스 농민들은 자신들의 삶을 개척하면서 새로운 관계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아시아 전 지역에 퍼져있는 각국의 민중교역조직들과 연대를 맺고 만나며 서로 필요한 것들을 나눈다. 이런 평등한 국제 연대관계 속에서 남의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열었고, 북의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유기농 마스코바도 설탕의 고장 네그로스에서 이제 나는 함께 살아가는 길을 열 때 사람들의 삶이 근본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도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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