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확산과 소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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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02-09 13:38
제목 Bonjour Pansori 공연 참관기
링크 http://vimeo.com/119091973 [162]
링크 http://vimeo.com/119091974 [167]


 

Bonjour Pansori 공연 참관기

이지원(국학연구원 연구보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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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onjour Pansori 공연은 2014년 12월 30일 화요일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열렸었다. 공연은 아니리 광대 헤르베 페조디에(Hervé Péjauder) 님과 판소리 광대 민혜성 님이 최효동 고수 님의 장단에 맞춰 홍보가, 춘향가, 심청가의 유명한 대목들을 각각 불어와 한국어로 돌아가면서 불러주시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공연이 시작하기 전 사회를 맡으신 한유미 님의 설명에 따르면 이런 형식은 프랑스와 벨기에 등 불어권 관객들에게 판소리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탄생하였다고 한다. 불어로 공연을 하자니 한국 문화로서의 판소리 자체의 흥이 잘 전달되지 않는 것 같고, 한국어로 공연을 하고 불어 자막을 달아놓으니 자막을 따라가기 바빠 정작 무대에 집중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두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판소리의 내용만이 아니라 판소리 문화 자체를 ‘번역’하기 위한 노력이 이러한 공연 형식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공연 감상을 기록하기 전에 사실 고백할 게 있다. 이 공연의 내용에 대해서 알게 되었을 때 나는 과연 스스로가 이 역할에 적합한 사람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 나는 판소리 문화에 대한 조예가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한국 사람인데 언제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보지 않았을까 싶어 기억을 더듬어 보니 중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선생님께서 틀어주신 영상을 본 기억이 희미하게 났고, 1990년대 중반 육각수의 히트곡 “흥보가 기가 막혀”를 친구들과 노래방에서 부른 기억이  좀 더 강렬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둘째, 나는 불어와도 인연이 먼 사람이다. 대학교 4학년 때 불어 책을 원어로 읽고 싶다는 열망에 초급불어 수업을 들었으니 그래도 아베쎄데는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중간고사 때 홀로 답안지의 절반을 채우지 못하고 좌절하여 그 이후 불어를 공부하지 않았다.


  판소리와 불어, 둘 중에 하나라도 알아야 그래도 50점짜리 참관기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초조함과 불안감을 덜 수 있었던 장소는 연구실 책상이 아니라 공연 현장이었다. ‘아니리 광대’의 ‘아니리’는 예부터 소리판에서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헤르베 님의 자연스러운 소리, 그리고 연기는 불어를 모르지만 그래도 판소리의 유명한 대목을 지나가면서라도 들어본 한국인 관객에게 지금 어떤 대목을 진행되고 있는지 정도는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민혜성 님의 소리야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언어 문제도 없었거니와 공연하시는 분의 기량이 부족하기 그지없는 한 관객의 감수성을 압도하고도 남았었다. 특히 놀보의 심술에 홍보 마누라가 답답해하며 “그러거들랑 가시오”라며 곡을 하는 부분에서는 친척들과의 관계에서의 어려움을 어린 자식에게 토로했던 어머니가 떠오르며 감정이 복받쳐 오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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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가장 큰 위안을 주었던 것은 관객들이었다. 공연장에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불어권 사람들로 추정되는 관객들도 여럿 와있었다. 우선 한국 관객의 경우, 아무래도 헤르베 님이 소리를 하시는 부분에서 추임새를 넣으며 공연을 즐기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홍보가 화초장을 업고 가는 부분, 이도령과 춘향이 서로를 업으며 사랑 놀음을 하는 부분, 심봉사가 장님 잔치에 가는 부분같이 연기가 강조되는 부분은 다들 즐겁게 웃으며 볼 수 있었지만 몸짓 없이 이야기만 주욱 이어지는 부분에서 웃음을 지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불어권 관객들이었다. 반면 민혜성 님이 소리를 하는 부분에서 불어권 관객들의 집중도는 확연히 떨어지는 것으로 보였다. 간혹 동행한 한국인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며 공연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관객들도 있었지만 몰입이 쉽지 않아 보였다.


  결국 이 공연은 나 혼자에게만 낯선 것이 아니라 공연장에 앉아있던 모두에게 각자 다른 순간, 다른 의미에서지만 어쨌든 간에 낯선 것이었다. 이러한 서로 다른 ‘낯섬’들은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공연팀들이 맞이했을 어려움을 상상하게 해주었고, 문화를 번역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하였다. 언어와 국적에 따라 문화에 대한 감상이 크게 달라진다고 가정했을 때, 한국인/프랑스인 광대가 한국어/불어로 한국인/프랑스인 관객을 대상으로 할 때 떠오를 수 있는 감상은 단순히 곱셈만 해보아도 최소 2x2x2=8개 이상이다. 같은 무대를 보고 같은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있었던 프랑스인 관객과 이 공연에 대한 감상을 공유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함께 본 공연에 대한 감상을 관객들이 수월하게 공유할 수 없다는 것은 번역된 문화가 안고 갈 수밖에 없는 어려움이 아닐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번역의 어려움이라는 건 내 부질없는 소심함에서 비롯된 환상이지 않나 싶기도 하다. 연구실 책상에서 고민하다가 공연장에 가서 번뇌를 덜 수 있었듯이, 외국인의 뒷모습만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는 대신 직접 다가가서 공연을 어땠는지 물어보았다면 상황은 다르지 않았을까? 오히려 판소리에 익숙한 한국인 관객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풍부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나누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한국의 판소리 광대와 고수 및 관계자들이 유럽에 다가갔고, 또 헤르베 님이 판소리를 배우기 위해 다가왔듯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관객들도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런 ‘다가감들’이 모였을 때 문화의 번역이라는 과제가 보다 풍성한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뒤늦게 지금에 와서야 말이라도 붙여볼 걸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곧바로 이어 불행히도(혹은 다행히도) 나는 불어를 공부하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했기에 그날 다가가려도 했어도 다가가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학 실력이 되시고 글쓴이의 부족한 논지에 수긍할 수 있는 분들께서는 이런 공연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나처럼 혼자 여러 의문에 쌓인 채 집에 돌아오기 보다는 다른 문화권의 관객들과 이야기를 차라도 한 잔 나누면서 의문도 해소하고 문화의 번역에도 일조를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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