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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3-23 17:24
제목 누가 읍참마속을 두려워하는가?


 
강양구 / 프레시안 기자
    
 
누가 읍참마속을 두려워하는가?
 
    
10년 가까이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정치인, 기업인, 공무원보다는 이른바 ‘먹물’들과 어울릴 일들이 많았다. ‘지식인’이라는 표현을 감히 쓰지 못하는 것은, 그들 자신이 ‘지식인’보다는 ‘먹물’이라는 표현을 즐겨 쓰는 사정 탓이다. 보통 대학에서 공부를 하는 그들은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몹시 쑥스러워한다.
    
그렇게 ‘먹물’들과 어울리다 보면, 틈만 나면 도마에 오르는 이들이 몇몇 있다. 역사학자 ◌◌◌, 경제학자 ◌◌◌, 사회학자 ◌◌◌, 정치학자 ◌◌◌, 심리학자 ◌◌◌, 법학자 ◌◌◌, 철학자 ◌◌◌…. 철따라 오르내리는 이름이 다소 바뀌지만 공통점이 있다. 일단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언론에 이름이 자주 오르내리는 스스로 ‘지식인’ 연하는 이들이다.
    
이들은 돈 주고 책을 사보는 독자가 수천 명 (혹은 수백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문 도서 시장에서 크고 작은 출판사마다 책을 내보려고 안간힘을 쓰는 필자들이다. 실제로 이들이 내는 책은 많게는 몇 십만 부에서 적게는 몇 천 부의 판매를 보장한다. 더구나 이들 중 몇몇은 탄성이 저절로 나오는 다산성을 자랑한다.
    
그렇다면, 1년에 성인의 66.8퍼센트가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은 현실에서, 그나마 독자가 주머니를 열게 만드는 이 고마운 지식인들이 왜 ‘먹물’들의 도마에 오르는 것일까? 짐작하다시피, 내용은 뻔하다. “동어반복”, “자기표절”, “횡설수설”, “침소봉대”, “멍텅구리”, “구제불능”…. 급기야 알코올이라도 양념으로 곁들이면 마지막 결론이 내려진다. “쓰레기야!”
    
이런 ‘먹물’들의 내부 고발(?)이 시샘 가득 찬 헛소리였을까. 아니다. 지식인의 적나라한 맨얼굴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출판사 편집자들의 내부 고발(!)까지 염두에 두면, 이런 ‘먹물’들의 고발은 대개 근거가 있는 것이다. (허명에 취한 지식인이여! 출판사 편집자를 무서워할지니….)
    
그런데 이상하다. 10년 전부터 “동어반복”에 “자기표절” 혐의를 받았던 지식인은 여전히 출판사의 섭외 1순위다. 5년 전부터 “멍텅구리”에 “구제불능” 판정을 받았던 지식인은 여전히 출판사의 블루칩이다. 또 다른 지식인은 각종 학술 잡지의 고정 필자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별의별 책의 표지 혹은 띠지에 추천사를 남긴다.
    
이상한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그렇게 10년 동안 혹은 5년 동안 “쓰레기야!”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던 ‘먹물’들이 이런 지식인의 실명 비판에 나서는 것을 보지 못했다. 실명 비판 풍토를 마련해보고자 내가 관여하는 북 리뷰 섹션('프레시안 books')에 해당 지식인의 책에 대한 서평을 권유해도 나오는 대답은 똑같다. “강 기자, 똥이 무서워서 피합니까? 더러워서 피하지!”
    
온갖 인연으로 얽힌 한국 사회에서, 이미 수차례 불가능한 일로 확인된 ‘실명’ 비판을 새삼 강조하려는 게 아니다. 또 어느 시대나 있기 마련인 매명하는 지식인을 질타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 기이한 침묵이 부메랑이 되어서 지식 사회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사회를 좀먹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업으로 하는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 무엇일까? 어쭙잖은 견해를 말하자면, ‘옥석 가리기’다. 옥석이 제대로 가려지지 않을 때, 그 공동체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고 더 나아가 활력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런 공동체에서는 후배가 선배를 존중하지 않고, 학생이 교수를 존경하지 않는다.
    
내부의 사정이 이럴진대 개차반 같은 이런 공동체를 누가 거들떠보기라도 하겠는가? 한국 사회에서 어느 순간부터 지식인 특히 공부를 업으로 하는 이들의 말발이 먹히지 않게 된 중요한 이유는 이런 사정과 무관치 않다. 생각해 보라. 지금 한국 사회에서 특정 정파의 ‘좌장’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에서 ‘선생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식인이 몇이나 될까?
    
아니 대폭 범위를 축소해서 대학 사회만 놓고 보자. 학점에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대학생으로부터 ‘선생님’ 소리를 들을 자신이 있는 지식인은 몇이나 될까? 확신하건대, 대학생 열 명에게 물어보면 대다수는 “시바, 시바” 하며 저자거리의 음모론이나 읊조리는 <나는 꼼수다>의 “무학의 지식인”을 ‘존경하는 지식인’ 반열의 첫 번째에 올려놓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공부를 업으로 하는 이들, 혹은 ‘먹물’들이 개차반 취급을 당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한국 사회에서 ‘이성의 보루’라고 할 만한 공간을 지키는 이들이 여전히 바로 그 ‘먹물’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한국 사회의 균형 감각에 심각한 손상이 온다.
    
이미 그런 균형 감각은 치명적인 손상을 입었다. 예를 들어서, 얼마 전까지 한국 정치를 쥐었다 폈다 하던 한 잠재적 대선 후보는 다름 아닌 ‘무릎팍 도사’가 점지한 이다. 또 다른 야권의 유력한 대선 후보는 어떤가? 지지율이 치고 오른 계기는 다른 아닌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시절의 ‘식스팩’을 보여준 탓이다. ‘감성’이 ‘이성’을 압도하는 상황이다.
    
일찍이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사회평론 펴냄)에서 대중 민주주의 시대에 ‘감성’이 ‘이성’을 압도하는 상황을 이렇게 예견했다.
    
“정치 참여 층이 점점 확대되고 이질화되면서 이성에의 호소가 점점 어려워진다. 논쟁의 출발점이 되는,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가설들이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그러한 보편적인 가설들이 존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직관에 의존하게 된다. 이질적인 집단들의 직관들은 당연히 서로 다를 것이므로 직관에의 의존은 결국 충돌과 힘의 정치로 이어지게 된다.” (140~141쪽)
    
지금 한국 사회가 바로 그렇다. ‘옳다’/‘그르다’가 아니라 ‘좋다’/‘싫다’로 시민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합리적 토론에 근거한 바람직한 미래상을 만들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런 상황을 더욱더 부채질하는 것이 바로 공부를 업으로 하는 ‘먹물’들의 자폐증 같은 상황이다.
    
자,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나는 ‘먹물’들의 ‘지식인’ 선언이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연구를 다시 한 번 자리매김하는 것, 그 과정에서 치열한 비판과 토론을 마다하지 않을 것, 더 나아가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선생, 선배, 후배의 목을 칠 것.
    
바로 여기서 시작하지 않으면 21세기 한국 학문의 미래는 물론이고 한국 사회의 미래도 없다. 여기까지 글을 쓰고 있는데,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후배 기자가 묻는다. “선배! ○○○가 또 토론회에 나온다고 하네요. 도대체 그 말도 안 되는 ‘멍텅구리’는 왜 자꾸 여기저기서 부르는 거예요.” 어이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