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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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3-23 17:35
제목 학부생 통신원을 소개합니다.

 
     20대를 보내다 보면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냐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솔직히 말하자면, 우리도 잘 모르겠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둘째 치고서라도, 생각이란 걸 하고는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도무지 생각이란 것을 할 겨를이 없다. 대학이 취업학원이 되고 시장이 마트에 죽어나가는 현실은 매우 안타깝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당장 나가서 촛불이라도 들어야 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작은 반지하방 하나라도 유지하려면, 겨우 사귄 애인과 부모님 눈치 보지 않고 하룻밤을 보내려면, 그리고 어떻게든 살아 남아 졸업을 하려면 어떻게든 토익을 채우고 학력을 세탁하고, 그걸로 직장을 사와야 하고, 또 시간 쪼개가며 재래시장에서 물건을 사올 여유 같은 것들은 챙길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이다, 생각할 시간도 없는 우리들에게 대체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없는 생각들을 쥐어짜 사회인문학이라는 이름 하에 이 곳에 이야기를 쏟아내는 것은, 결국 지금까지의 현실에서 철저하게 무기력한 당위에 불과했던 인문학이란 존재가 우리에게 무엇이 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다. 우리는 지금부터 6개월 동안 우리를 둘러싼 현실들을 하나씩 바라보려 한다. 그것은 당장 ‘스펙’을 얻어내기 위해 과와 학교를 옮겨 다니는 고단함에 대한 토로가 될 수도 있고, 당장 앞날이 불투명한 재래시장의 위기를 외면하고 마트로 편의점으로 물건을 사러 다니는 몰인정함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가능하다면, 이 모든 이야기가 사회인문학의 가능성을,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를 구속하는 당위가 아니라,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괜찮은 도구로서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명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다는 어느 인디 시트콤의 제목 맞다나 어쨌거나, 할 수 있는 자가 구해야 하지 않겠나.
    
       
김한솔
   
     언제부터인가 자기소개를 부탁받게 되면 기깔나게 특출나고 개성적인 무언가를 써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사실 이 글도 그런 압박 속에서 쓰여진 글이거니와, 이런 상황에 처한 것이 꼭 나만은 아닐 것이다. 나처럼 대학원 원서를 준비하고 있는 잉여도, 대학원 원서가 아닌 입사원서를 쓰고 있는 당신도, 입사원서 대신 공모전에 출품할 기획서를 쓰고 있는 당신도, 기획서 대신 슈퍼스타 K4 예선에서 던질 멘트를 짜고 있는 당신들도, 실은 언제나 남과는 무언가 심각하게 다르고 특별한 무언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지 않던가? 하지만 언제부터 나와 남의 인생이란 것이 그리도 천양지차로 다른 것이었더란 말인가. 적어도 우리가 지금 하려고 하는 것이 ‘쓸모있는 인문학’이라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차라리 아무런 특별함도 없는 가장 보통의 존재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 어차피 인문학이 가진 쓸모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별 것 없고 별 것 없을 우리의 인생에서 주워 섬길 수 있는 조약돌만한 깨달음일 것이고, 또 사실 우리에게 필요한 인문학이란 결국 가장 보통의 사람들을 위한 인문학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 적어도 지금 여기에서는 내가 누구고 얼마나 특별한지에 대한 질문은 잠시 묻어두기로 하자. 나는 그냥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평범한 당신이고, 기껏해야 앞날이 캄캄한 대학원 원서를 쓰고 고치는 일을 상상하며 귀찮음에 몸을 떠는 그저 그런 06학번일 뿐이다. 그냥, 그 정도로 해두자.
   
   
이한솔
    

     학부생 통신원 이한솔입니다. 몇 평짜리 ‘방살이’를 하며 밥보다 커피가 좋으나 프랜차이즈 커피점은 비싸므로 사먹지 않습니다. 밥값을 아껴 술을 사먹고, 술값을 아껴 책을 사(면 좋겠)고, 학교 수업은 재미나지만 학점과 취업이 결합되면 왠지 싫어지는 무난하디 무난한 학부생입니다. 지금은 작은 방에서 바퀴와 함께 삽니다. 바퀴, 개미, 도심의 비둘기, 고양이 같은 ‘왜  사는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는 이들을 탐구합니다.  해끼치지 않고 사는 삶을 꿈꾸며, 집 안, 벽 속, 방 안, 벽장에 갖혀 있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놀이판을 벌이는 유쾌함을 지향합니다. 통신원이란 역할에 걸맞게 이곳저곳 오가며 서로의 목소리를 수신해보고자 합니다.
   
 
장형순

     일반적으로 대학 생활은 자신의 20대를 구성하는 한 부분, 자기 청춘의 한 조각이게 마련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20대와 학부 생활이 정확히 일치하는, 청춘의 동의어로 대학을 사용하는 내가 있다. 그 10년 동안, 적극적으로 주먹을 쥐고 교문 밖으로 몰려 나가던 청년들은 소극적으로 펜을 쥐고 도서관 안에 자리를 잡았으며, 캠퍼스에 낭만과 앞 다투어 피어나던 꽃들은 3월 한철의 사진 배경이 되었다. 우리에게 세대론이 교복처럼 덧 씌워진 지점은 내 20대의 반환점 즈음에 위치한다. 언제나 여물어가는 시기는 배고프고, 준비하는 과정에는 실패가 만연하며, 때문에 새벽녘의 푸른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던 것이 청춘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목격한 그 반환점 전 후의 '청년'이 지칭하는 뉘앙스가 분명 다르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 것일까. 이 변화는 어디로부터 시작된 것일까. 우리가 눈치 보며 숨죽이고 있는 그 시끄러운 '세대'란 놈은 실은 천둥 뒤의 번개처럼 허망한 경고이지는 않을까. 국학연구원의 학부생 통신원으로써 이러한 세대의 여러 장면을 돌이켜보고, 고민과 의미, 그 해법까지도 찾아보고 싶다. 이 와중에 내가 제일 위태롭다. (장형순. 경제학과 4학년. 10년째 학부를 다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