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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3-23 17:29
제목 말문을 열며, "공공성과 여성성"

 

 
존경하는 김현미 선생님
 
 
     새 학기를 맞아 안녕하신지요? 국학연구원 HK사업단에서 내준 숙제로 선생님께 갑자기 편지를 드리려니 공연히 쑥스런 마음이 앞섭니다. 한 교정이라는 동일 공간에서 생활하면서도 자주 뵙지 못하는 제 삶의 모습이 마치, ‘동일 공간 속의 만남과 관계’는 상실해가면서도 ‘수많은 익명의 타자들과의 소통’엔 익숙해지는 현대적 소외나 유사 자폐화의 한 표상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삶은 거의 모두, 외면적 바쁨과 내면적 공허함이 공존하듯, 사이버 공간에서의 활발한 소통과 현실 삶의 공간에서의 관계의 소원함이 병진하는 것 같습니다. 이 편지를 시작하면서, 인터넷이 소통을 증진시키는 반면에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은 아닌지, 자동차·전화·텔레비전·개인용 컴퓨터 등이 나왔을 때 이들 문명의 이기의 등장과 삶의 관계에 대한 많은 논란들을 떠올려봤습니다. 
 
선생님 
     오늘 국학연구원 HK 사업단에서 제게 내준 숙제는 공공성(publicness)에 대해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어 달라는 것입니다. 제가 HK사업단의 사회인문학 주제를 정할 때 함께 참여하였다는 이유로 이 어려운 숙제를 내준 것 같습니다. 곤혹스럽지만 기왕에 숙제를 받았으니, 공공성을 둘러싼 많은 논의 중에서, 평소에 생각하던 두어 가지를 말씀드리고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제가 오늘 말씀드려보고 싶은 문제는 공공성을 준거삼아 이분법적 사고를 넘는 사유방식에 대한 조심스런 질문입니다. 사회인문학이라는 조어에 이미 인문학과 사회과학, 학문과 사회, 개인과 전체, 사유와 실천, 개별기술성과 법칙정립성의 구분을 넘어보려는 숨은 의도가 내재되어있지만, 문제를 공공성으로 확대하면 우리사회의 이해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여전히 공공과 사사, 개인과 전체의 날카로운 이분법에 머물러있지요. 이 점은 사실 오늘날 우리가 분과병립적(multi-disciplinary), 분과횡단적(cross-disciplinary), 분과초월적(trans-disciplinary), 분과융합적(inter-disciplinary) 문제를 고민할 때조차, 숱한 시도나 말들과는 달리 실제로는 여전히 전통적인 사유체계, 글쓰기 및 학문제도에 빠져있는 것과 유사한 알레고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인문학(humanities)이 사회성을 당연히 전제하는 인간성(humanity) 문제를 놓쳐왔다는 최근 서구의 여러 반성도 문제의식은 여기에 놓여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인문학 역시 최근에는 고령화, 환경, 빈곤, 분배, 복지, 민주주의, 재난, 평화 등 과거 사회과학의 중심적 문제영역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 같습니다.
 
     먼저, 저는 공공성을 개인성, 개별성, 인간성의 관점에서 접근해야한다고 봅니다. 지나친 일반화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사회에서 공공성 논의는 늘 사회나 체제의 전체 성격과 연결지어서만 논의되는 것 같습니다. 또 늘 거기에 머물고 마는 것 같습니다. 물론 강조할 필요도 없이 공공성의 문제는 전체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입니다. 정치를 포함해 특정 체제와 공동체 전체의 성격은 거의 전적으로 공공성의 발현 정도에 달려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사회의 공공성 논의는 거기에 그치는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제 생각으로는 공공성은 결코 목적이 될 수 없고, 체제논의에 머물러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사실 인간성과 개인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수단과 절차의 문제라고 여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공공성의 목적은 바로 인간성과 개별성의 구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육아, 교육, 노동, 임금, 일자리, 연금, 여가, 복지 문제에서 높은 보편성과 공공성을 추구하는 이유는, 그 결과가 개별 삶들의 안정성, 예측가능성, 형평성, 평안성으로 연결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연령의 증대에 따라 변화하는 삶의 여러 측면에서의 체제의 공공성은 바로 그 시점 시점의 전체 개별 삶들의 내용과 성격으로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공공성의 부재로 인해 나타나는 다양한 수준과 형태의 개별실존들이 초래하는 차이와 차별과 격차를, 때로는 자살과 같은 선택으로 연결되어 삶과 죽음 자체를 갈라놓기도 하는, 즉 실존의 차이가 인간으로서의 본질 자체를 좌우하는 실존적 조건들을 형평화하고 공공화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삶들을 가능한 한 인간본질에 근사하게 접근하게 하려는 목적인 것이지요. 복수성과 개별성의 불가피한 상관성, 즉 사회적 실존의 공적 회복을 통한 개별적 실존의 본질로의 접근을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공공성은 어쩌면, 개인과 공동체, 인간과 세계에 대한 “양면 사랑”(caritas reipublicae)을 희구했던 근대 공화국과 공화주의 사상의 초기 고민처럼, 높고 낮고, 부유하고 가난하고, 잘 살고 못살고, 귀족이고 노예이고, 여자이고 남자이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데에 따라 서로 너무나도 다른 인간들을 공동체 안에서 일정한 공통의 사회적 연대성으로 묶어내어 인간으로서의 공통성(commonness)을 회복시키기 위한 기축 방편의 하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 실존의 문제를 깊이 고뇌하되 결코 단순한 실존주의자에 머물지 않고 개인과 공동체의 본질에 육박했던 고전고대의 소크라테스나 현대의 아렌트와 함석헌의 사유와 실천의 고갱이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결국 이 문제는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사유인 동시에 가장 현재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오늘날의 공공성 회복은, 전체성과 총체성의 추구 자체가 아니라 거꾸로, 사사성이 초래한 예종을 벗어나 인간으로서의 자율성과 자유와 해방을 회복시켜주는 기획일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의 신자유주의 하에서 공공성의 해체와 각종 사적 예종의 부활, 그리고 인간성의 붕괴, 자살율 급증과 출산율 하락의 계속되는 행진은 이를 더욱 무겁게 확인시켜주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
     한 가지 더 여쭤보고 싶은 문제는, 공공성과 성평등성 또는 여성성의 관계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OECD통계를 상세히 비교하여 한국사회의 정치, 경제, 교육, 사회적 개혁과제를 제시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OECD자료를 꼼꼼하게 분석하다가 공공성이 높고, 따라서 민주주의와 분배체계, 복지체제를 제대로 갖춘 나라들의 어떤 일관된 공통점을 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선진 민주복지국가들은 모두 여성성=성평등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는 점입니다. 특히 국회의원, 내각, 국가수반, 고위공무원을 포함한 공공영역에서의 여성의 비율이 아주 높았습니다. 여기에는 거의 예외가 없었습니다. 즉 여성성, 공공성, 민주성, 형평성, 복지성은 같이 간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들 사이의 인과관계나 선후관계를 밝히는 것은 쉽지 않지만, 비례관계나 상관관계는 명백히 존재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중요한 문제를 하나 던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왜 여성성과 공공성은 함께 가는가? 제 생각이 틀렸는지는 모르지만, 저는 여성성의 (증진)문제는 곧 인간성의 (증진)문제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즉 공공성을 통해 해결해야할 숱한 문제들이 실은 여성의 문제인 동시에 곧 인간의 문제이기 때문이라는 점입니다. 아니 어쩌면 여성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문제인지도 모릅니다. 말을 바꾸면 인간문제로서의 여성문제인 것이지요. 즉 여성문제가 해결되면 인간문제는 해결되지만, 그 역(逆)마저 꼭 진실인 것은 아니지요. 즉 인간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반드시 여성문제가 해결된다는 보장은 없다는 점입니다.
 
     이유는 간단하다고 생각됩니다. 인간문제 해결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문제의 당사자가 직접 해결의 주체로 나서는 것입니다. 이른바 객관의 주관화를 말합니다. 내게 다가온 모든 객관적 문제들은 나에게는 객관적이지 않고 언제나 주관적이지요. 동시에 개별적이지요. 객관성이 지니는 주관성을 깨달을 때 우리는 비로소 객관성의 주체화와 전체성의 개체화, 즉 ‘주관적 객관성’이나 ‘객관적 주관성’의 통합적 사유체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문제는 모든 사회나 개인들에게 그러하지 않나 싶습니다. 민중의 자기지배라는 뜻을 갖는 민주주의의 본래의 뜻이나, 평화이론의 핵심요체, 즉 갈등의 주체가 평화의 주체가 되어야 비로소 공고한 평화가 구축된다는 통찰도 여기에 닿아 있구요. 
 
     따라서 공공성과 여성성의 관계로 다시 돌아와 보면, 육아문제, 교육문제, 성별 학력별 임금격차, 복지문제, 비정규직 문제.... 등 많은 공공적 문제들은 바로 그러한 육아와 교육과 임금차별 등의 문제로 고통받아온 주체들이 문제해결의 주체로 변전되면서 공공성의 제고와 함께 한 사회의 여성성, 민주성, 복지성, 형평성, 안정성 등이 연쇄적으로 풀려나갔다는 점입니다. 개별적 인간문제의 많은 부분이 해결된 것 역시 물론입니다. 때문에 저는 공공성 구현의 가장 중요한 구체적인 징표의 하나는 바로 여성성의 실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분야의 OECD통계와 지표들을 통합적으로 분석하면서, 확고하고도 경험적으로 깨달은 점은 이것이었습니다. 저의 막연한 인식과 주장이 경험적으로도 선명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한국사회가 안고 있는 고통스런 육아, 교육, 복지, 임금차별, 성차별, 연금체제.....의 문제는 정치의 문제, 특별히 여성정치의 문제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들은 공공영역, 특히 사회의 공적 가치와 자원을 배분하는 정치의 영역에서 여성의 대표성이 급증하여 남성과 대등해지면 거의 전부 해결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습니다. OECD국가들에 대한 통계를 상세하게 비교하면 할수록 이 문제에 대한 저의 확신은 개인적인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 주장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최근 저는 우리사회의 여성국회의원 공천 비율을 둘러싼 논란을 보며, 제시된 15%보다 훨씬 더 높아야한다고 오래전부터 주장을 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육아, 교육, 복지, 임금 .... 등 우리사회의 숱한 인간문제들은 해결되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주체의 절반이 공공영역에서 거의 배제된 가운데, 타자들에 의해 바람직하게 해결된 사례를 인류사회는 거의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갑자기 편지를 드리게 되어 거듭 송구하나, 과연 앞에서 말씀드린, 공공성을 개인성 및 여성성과 연결시킨 저의 논점이 문제를 제대로 본 것인지 조심스럽기만 합니다. 공공성을 공적 차원에서의 인간문제, 개인문제의 해결이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여성문제는 또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셋을 엮어서 고민해 보았습니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연구와 사유가 깊으신 선생님께서 높은 식견과 통찰로 저의 단견과 실수를 깨우쳐 주실 것을 믿으며 어리석은 저의 편지를 맺을까 합니다.
     머지않아 봄꽃이 만발할 교정을 즐기시길 빌며 이만 줄입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2년 3월 22일
                                 박명림 드림   
 

엄용훈 12-03-28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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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말씀 모두 깊디깊은 동의를 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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