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학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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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2-04-26 00:40
제목 박명림 선생님께

 
 
박명림 선생님께
    
 
선생님 말씀대로 같은 직장에 다니면서도 너무나 먼 부서에 배치된 느낌으로 자주 뵙지 못하고, 대화할 시간도 못 가졌네요. 그래도 글을 통해 의견을 교환하게 된 것이 큰 기쁨입니다. 역사와 철학적 사유에 기반을 두어 정치학을 하시는 선생님이야말로 사회인문학의 의미를 현실화시켜내시는 분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사회인문학은 국가의 연구수주를 받기위한 조어적 발명품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무엇이 인문학이고 무엇이 사회적인가에 대한 구분이 저에게는 매우 어색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형용사적으로 사용된 사회라는 말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제게는 인문학적 감성과 상상력이 사회적인 것과 분리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의 사회적 관심은 사실 청소녀 시절 언니들로부터 물려받은 소설과 TV나 영화를 보며 함께 했던 잡담들로부터 기원한 것 같습니다. 최근 송경동 시인의 행동주의가 만들어 낸 놀라운 사회적 역동과 소셜엔터네이너라 불리는 많은 대중예술인들의 사회 참여 또한 고무적인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특정집단의 사유와 행동의 범주를 누가 강압적으로 구성하며 정치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을 발화하고 대표할 수 있는 권력을 독점해 왔느냐에 대한 저항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지적대로 사회인문학은 다양한 이분법적 범주를 해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한국의 인문학, 특히 연세대의 인문학이 각 연구자의 개별화된 전문가주의에 몰입돼 있던 상황을 성찰하며 공공성을 목표로 의미있는 지식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HK 연구가 끝날 무렵, ‘사회인문학팀이 완성할 공공적 지식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기대가 많이 생겼습니다.
    
이번 서신 교환에서 선생님께서 제게 주신 질문은 여성성과 공공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선생님께서 OECD자료를 통해 확인하신 것은 분명 사회적 진실입니다. 소위 선진 민주복지국가들 중 성평등 지수가 높을수록 그 사회의 자원이나 권력의 재분배는 공공성을 확장하는 데 기여합니다. 선생님의 분석대로 개별적 삶을 안정적이며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만든다는 것은 육아, 교육, 일자리, 건강 등 인간의 생애 과정의 가장 기초적인 것들을 공공적으로 돌보는것입니다. 특히 유럽 복지국가들은 공적 자원의 관리와 재분배의 일차적 목표를 자본의 총생산성의 확장보다는 사회적 재생산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두었습니다. 결국 남녀 구별 없이 각 개인은 사회권을 통해 국가와 협상할 자격을 갖게 되기 때문에 여성이라는 조건이 권리에 접근하는 데 장애로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 여성성에 대한 찬미 때문이라기보다는 여성에게 주로 부여되었던 육아나 부양, 돌봄의 부담을 사회적 안정과 삶의 질을 위해 국가와 시민사회가 많이 맡아주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부담과 제약에서 벗어난 여성들은 공적인 일에 더 많이 참여하면서 돌보는 일의 전문가인 여성의 관점이 정책에 잘 반영되어 선순환체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미국처럼 부유한 국가라 하더라도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긴 신자유주의 국가에서 공공적 복지의 개념은 급격히 사라지고 있습니다. 자원 있는 중산층은 이주여성을 가정부나 환자 도우미로 사적 고용하며 문제를 해결하고 있고, 빈곤계층은 복지 후퇴 이후의 모든 고통을 모욕적으로 견뎌 낼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모두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회적 조건을 이주민과 선주민 모두에게 강요하는 사회적 살인의 형태입니다. 공공성의 가장 기초적인 철학인 공정한 재분배를 통한 살림의 기획은 삶의 불안을 제거하고 사회적 활력을 만들어줍니다. 때문에 돌봄과 살림의 기획은 개별 여성이 담당해야 할 성구별적 아젠다가 아니라는 자각이 절실합니다. 
 
그러나 한국의 현실은 어떤가요? 한국은 주로 가족을 통해 사회적 재생산을 해결해왔습니다. 때문에 가족주의 이데올로기 안에 깊숙이 내재된 성역할 이분법을 유지하면서 경제 선진국으로 부상했고, 이 때문에 경제 지표에 비해 상당히 낙후된 성평등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남성들은 여성이 휘두르는 사적인 영역에서의 권력 때문에 사는 것이 힘들다며 여성에 대한 공공연한 적개심을 드러냅니다. 성인지 개념이 없는 남녀가 주도하는 정부 또한 사회적 기획을 젠더 관점과 연결하여 현실화시켜낼 수 있는 능력이 부재합니다. 문제는 인간 삶의 불안을 조장하는 좋은 돌봄과 일자리 부족, 건강의 위협을 공공성의 문제로 인식하기보다는 잔여적 복지의 개념으로 쉽게 대상화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처럼 교육과 전 영역에서 성취를 장려했던 사회에서 복지는 무능력과 의존, 게으름을 상징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복지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무능력을 사회적으로 공표하는 것이라는 두려움도 존재합니다. 정부는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활용하여 복지라는 말을 통해 때로는 국민을 현혹하고 때로는 분리하고 위계화하는 데 사용합니다. 사실 이제까지 한국 여성이 제공해 온 돌봄의 사회적 기여에 대한 인정과 인지가 있었다면 성평등은 곧 공공성의 확산과 연결된다는 신념이 진작 생겨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성이라는 특수한 조건으로 행해진 많은 일들, , 출산이나 육아, 살림, 환경 보호 등에서의 사회적 기여에 비해 물적, 감정적 보상이 너무 적어 여성들이 이제 이런 일들을 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겠죠. 때문에 한국 여성들은 사회적으로 기대되는 여성적 역할을 잘하는 것이 개인의 행복이나 성공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다른 탈출구도 갖지 못한 상황입니다. 복지제도와 사회적 안전망의 부재를 개인들 스스로가 메워야 하는 현실을 자각하게 되면서 남녀 모두 개별적 생존 전략에 익숙해지고 있고 경제적 이해관계를 넘어서는 사회 운동의 비전을 갖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성의 확장과 성평등을 연결시킨다는 것은 어떤 마음의 생태학을 요구하는 것인지가 저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자본주의의 현란하고 화려한 기술성에 우리의 삶은 이미 깊이 연루되어 있고, 사회적 네트워크 매체들의 팔로어(follower)에 의해 고무되는 나르시시즘적인 방식의 정치적 연대에 익숙해진 우리에게 기초적인 생존과 삶의 질의 문제를 성찰적인 젠더 감수성을 갖고 풀어 나간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된장녀개똥녀이후 사건들처럼 젊은 여성을 사회 패악의 상징으로 선택하여 토끼몰이식 사냥을 하는 현상이나 진보/보수 정치인들의 무차별적인 성희롱/성폭력 폭로전 등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요? 스마트폰이나 인터넷을 통해 여성 혐오의 대상을 물색하고, 사찰적 권력으로 그 대상을 응징하는 집단적 열정을 구축해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인 것 같습니다. 경제적 불안이나 사회적 불만이 고조되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훈육적 권력과 적대적 경쟁을 위해 동원되기 쉬운대상으로 취급된다는 것이지요. 포스트 신자유주의 이후의 사회적 기획을 고민하는 많은 학자나 연구자들은 젠더 문제의 해결 없이는 좋은 삶을 현실화시켜낼 수 없다는 점에 공감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이란 상징이 문화적으로 오용되고 남용되는 현실에서 공적 성찰성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을까요? 공공성의 문제를 여성성의 실현이라고 진단하신 박명림 선생님은 한국 사회의 이런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